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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상한새벽 Jan 16. 2022

#4. 이럴 거면 친절 하지나 말지

퇴사, 띄어쓰고 이직


지금은 흥미를 잃었지만 예전엔 만화책을 즐겨 읽곤 했었는데, 한 번은 일하는 여자에 대한 이상한 편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여자가 사회생활을 오래 하면 입버릇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옷차림도 신경 쓰지 않다가 마지막에는 흡연을 시작한다나 뭐라나. 엥? 이건 그냥 '사람'이면 다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나? 하면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시크한 일잘러인 여주를 괴롭히는 사회적 편견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고, 그땐 두 주인공의 러브러브 해피 엔딩을 보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덮어둔 부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그렇게나 좋아했던 두 주인공의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공감도 전혀 안되던 그 내용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일하는 여자'가 나의 현실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판에 박힌 듯이 일부분 그 과정을 거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암울해질 때가 있다. 출근하는 순간부터 희로애락 중 노만 소노, 중노, 대노, 극대노로 느끼도록 감정선이 발달되었고, 운율감 넘치는 시와 어디든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튼튼한 발을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었다. 담배에 손을 안 댄 건 순전히 한 번 시작하면 춥거나 더운 날에도 회사 주변 담배 동산을 어슬렁거려야 한다는 것 하나 때문이었다.


이미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긴 했지만 나름 긍정적이었고 못된 말은 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사이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한국의 매운맛 회사를 다닌 나는 꽤나 많은 부분이 변해 있었다.





그래서일까. 상냥한 사람을 만나면 유독 마음이 쉽게 열리곤 했다. 잊고 지냈던 인류애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사람. 한 요식업 브랜드의 마케터 포지션 건으로 연락을 받게 된 헤드헌터가 딱 그랬다.


JD 메일을 열어 보니 회사의 대략적인 정보부터 참고할만한 레퍼런스들, 기존 지원자들의 인터뷰 후기 등이 거의 유료 분석자료 수준으로 상세하게 쓰여 있었다. 의식의 흐름으로 써놓고 아무나 걸려라라는 마음으로 대량 살포한 것 같은 잡 오퍼 메일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오랜만에 받은 성실한 메일에 반해 버렸다. 회사 자체는 인지도가 있긴 했지만, 요식업종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기도 해서 이렇게 친절한 헤드헌터를 만난 게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친절해도 너무 친절했던 거였다. 지원해보고 싶다는 답변을 보내고 얼마 안 되어서 첨부가 포함된 메일이 몇 개 더 와 열어보니 그가 이전에 맡았던 다른 포지션 이직 후보자들의 서류 샘플이 들어 있었다. 물론 이름 같은 건 지워져 있긴 했지만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혹시나 내 이력서를 가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다가 중요 정보를 제대로 지우지 않고 보내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예전에 친구네 회사 인사팀에서 지원자의 이력서를 실수로 전사 메일로 공유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었던 터라 더 불안해졌다.


결국 고민 끝에 지원 의사를 철회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이유를 묻는 헤드헌터의 전화에는 먼저 지원했던 포지션에 최종 합격하여 미안하지만 다른 건들은 진행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핑계를 댔다. 그 말에 헤드헌터는 날 진심으로 아껴주는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해맑게 축하의 말을 건네 내 마음을 괜히 무겁게 했다.




하지만 이 헤드헌터와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위의 일로부터 약 한 달 후, 같은 회사의 데이터 분석 포지션으로 다시 잡 오퍼 메일을 받게 되었다. 내가 받았던 마케팅 포지션과 함께 오픈되었던 건인데 그 시간 동안 임자를 찾지 못한 채로 돌고 돌아서 다시 나에게까지 온 것이었다. 심지어 그 친절했던 헤드헌터로부터 말이다. JD 메일은 이번에도 역시나 친절 그 자체였다.


물론 담당 업무에 필요했다 보니 SQL의 기본적인 부분은 쓸 줄 알았지만 해당 포지션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심도 있는 분석을 위한 쿼리를 짤 수준은 못 되는 터라 별 고민 없이 거절의 메일을 보냈다. 데이터 분석 쪽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지원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이다. 그랬더니 바로 전화가 와서는 예의 그 친절한 말투로 혹시 저번에 최종 합격했다는 곳은 어떻게 되었냐, 기대하셨을 텐데 잘 안되셨다니 안타깝다, 그래도 이번 포지션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같이 주경력이 데이터 분석 쪽이 아닌 사람도 들어가서 만족하면서 다니고 있다면서 한참을 설득했다.


애초에 첫인상이 호감이었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얘길 하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봤을 때 내가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뭐, 안되면 면접 연습했다 치자라는 생각으로 일단 지원해 보기로 마음을 돌렸다.


며칠 후 그는 서류 합격의 소식을 전하면서 하루에 임원진 면접과 함께 SQL 테스트를 같이 진행할 예정이라는 얘길 뒤늦게 전했다. 아니아니, 전 SQL 테스트를 볼 정도의 실력은 못되는데요? 2주 전쯤에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 인사팀에서 연락을 받았지만 데이터 분석 포지션에다 SQL 테스트까지 봐야 한다는 말에 눈물을 머금고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라는 답을 했던 나였다. 이럴 거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길 가서 시험을 쳐보지 여길 왜? 내가 받은 그 친절한 메일에도 전형 과정 부분에 테스트 얘긴 쏙 빠져 있었다.


정말이지 눈에 뻔히 보이는 결말을 알고 가는 면접이란... 그래도 최선을 다해 의욕 가득한 지원자가 했을 법한 대답을 메소드 연기로 답하여 면접을 끝내고, 문제의 테스트에 임했다. 실제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감독관도 없는 방 안에서 이해하기도 힘든 문제를 읽고 그냥 흰 종이에 쿼리를 자필로 써내는 방식이었다. SELECT, FROM, WHERE 대신 SI, BAL, NOM을 써 두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기억이 나는 선에서 답변을 채워내고 나왔다.


모든 과정을 끝내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면접이 끝나면 연락을 달라는 헤드헌터의 문자가 와 있었다. 테스트 결과는 별로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얘기와 함께 정말 궁금했던 걸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채용 과정에 SQL 테스트가 있다는 얘긴 미리 안 하셨나요?"


그랬더니 그의 답은 이랬다.


"아, 새벽님보다 경력이 좋지 않은 사람도 어렵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했어서 쉽게 푸실 줄 알았어요."


여전히 친절함이 넘쳐나는 말투에 나는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뻔히 내 것이 아닌 포지션에 지원을 한 것도 내 잘못이요. 쉬운 SQL 문제도 풀 줄 모르는 내 무능력함이 내 잘못이지. 그런데 이상하게 내 불합 여부도 알려주지도 않고 잠수를 탄 헤드헌터들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된 건 왜였을까. 정말 이럴 거면 친절 하지나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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