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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Nov 03. 2021

높은 곳만 바라보는 사람

짬이 비리비리하여 미천하던 시절, 높은 분과 함께 회사 앞의 식당에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갔다. 가끔 가던 식당이었고, 익숙한 식당이었는데 그날따라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기분이 들었던 것은 기우가 아니었다. 자리가 없어 식당의 문쪽에 앉게 되었던 것이 화근이었으려나. 식당 주인아주머니께서 오시더니 문이 열렸는데 문을 안 닫고 뭐 하고 있냐고 난데없는 짜증을 나에게 내기 시작했다. 내가 문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기에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일단 문을 닫았다. 뭐 거기까지만이었으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일이 아니었을 텐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던 주인아주머니는, 내 앞에 앉아있는 높은 분을 보더니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어머,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세요? 자주 좀 오세요, 서비스 좀 드릴까요?' 등등 세상에 태어난 후 가장 행복해 보이고, 가장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이신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갖 아양과 애교를 다 떠시면서 높으신 분을 극진히 대접하기 시작했다.


이건 무얼까 하는 생각과 함께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더니 좋은 거였구나, 화가 난 거는 나에게 화가 난 거였구나, 그런데 내가 뭐 딱히 잘못을 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나도 손님인데 등등의 생각과 더불어 가장 많은 생각이 들었던 포인트는 바로 나와 높으신 분과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낮은 사람에게는 아무렇게나 대충 기분 내키는 대로 대하고, 높은 사람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해 극진히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지만, 나도 높은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식당을 더욱 오랫동안 이용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은 내 앞의 높은 사람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을 못하는 건가 하는 의아함도 생겼다. 너무나 불쾌한 경험을 하고 난 내가 다음에 그 식당을 갈 일이 있었겠는가? 말해 뭣하랴. 높은 곳만 바라보던 그 식당 주인은 5년짜리 고객의 마음은 얻었을지 모르겠으나, 20년짜리 고객은 잃어버렸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윗사람에게 얘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식당에서 '여기 주인 나오라고 그래!'라고 소리치면 될 것 같고, 주민센터에 가서 '동장 어디 있어!'라고 화내면 될 것 같다. 밑의 직원들한테 얘기해봤자 규정이 어떻고 절차가 어떻고 얘기만 들을 것 같아 필요 없을 것 같고, 권한이 있는 윗사람한테 얘기하면 신속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임자는 보통 윗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절차와 방법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다. 일의 결과만 봤을 때는 빠르고 정확한 처리였다고 생각될 수는 있으나, 과정을 봤을 때는 조금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당장의 일은 해결되었을지 모르겠으나, 다음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매번 윗사람을 찾아 청탁하듯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이번에는 어째 어째 윗사람과 연결이 되었을지 모르겠으나, 다음번에도 윗사람이 내 얘기를 들어주고 일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더욱 문제인 것은 윗사람을 찾느라 아랫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다음번에 아랫사람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아랫사람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절차와 방법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절차와 방법대로 일을 하는 아랫사람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이유는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이번에도 윗사람에게 가세요, 저는 권한도 없고 책임도 없습니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있을 뿐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기본적인 프로세스는 실무자가 상황에 대해 인지를 하고 정확한 현황 분석을 통해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충분한 검토가 가능하고 성과도 날 수 있다. 그런데 윗사람을 찾음으로써 발생한 일들은 실무자가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일들에 대해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다.  상황과 현황에 대해 실무자가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엉뚱하게 다른 곳에서, 갑자기, 절차도 맞지 않게, 지시로 내려지는 일은 성과가 날래야 날 수가 없다. 그냥 대응만 할 뿐이다. 검토해보고 싶은 의욕도 없고, 실제로 검토를 할 동기와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요청자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어낼 수는 있으나, 그게 최선의 결과는 아닐 가능성도 농후하다.


윗사람을 찾는 사람의 위치도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식당 주인은 '주인'이었기에 아랫것들보다는 윗사람 위주로 상대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회사에서 다른 팀의 팀장이 전화 와서 팀장을 찾았다면, 그럴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겠으나, 아랫사람의 포지션에 있는 대리나 과장이 전화를 해서 대뜸 팀장을 찾는다면, 그건 그러면 안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예의를 차리거나 격식을 차리자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담당자(혹은 실무자)를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바로 윗사람과 얘기하는 데 따르는 갈등의 문제이다. 전화를 받은 팀장은 실무자를 불러 요청사항을 전달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실무자는 지시로 느껴지는데 그 지시의 원천이 바로 다른 팀의 실무자라는 것에서 오는 갈등 말이다. 실무자들끼리 상황을 공유함에서부터 일이 시작된 게 아니라, 다른 팀의 실무자가 우리 팀의 팀장을 통해서 지시를 하게 돼버린 결과이다. 일방적으로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것도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닌데, 그 지시의 원천이 윗사람이 아니라 동료 혹은 아랫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더더욱 기분은 좋지 않을 수밖에.


더군다나 때로는 아랫사람이 더 디테일하고 세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관리자는 높이 보고 멀리 봐야 하는 것과 반대로 아랫사람은 더 가까이에서 더 자세히 봐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례히 팀장이 제일 많이 알 것 같으니 다른 팀의 실무자가 대뜸 팀장에게 전화한다면 요청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속시원히 해결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많다. 원하는 결과도 바로 얻지 못하고, 실무자들 서로 간에 앙금만 남는 상황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나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예의와 격식을 꼭 갖추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되고 통용되는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일을 해야 결과도 좋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닥친 일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절차와 방법이라는 것은 정상적이어야 다음번에도 문제가 안된다. 비정상적인 방법은 다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대뜸 윗사람부터 찾는 일은 비정상이다. 아래부터 차근차근히 밟아나가는 게 정상이고 바람직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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