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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Aug 29. 2018

플러팅보다 춤이 좋은 이유

안전한 관계의 연습으로서의 센슈얼 댄스

"춤출 때만큼은 나를 사랑해" 

<댄서의 순정>에서였나, 고인이 된 배우 김주혁이 파트너와 사랑의 춤인 룸바를 추기 전에 던진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닭살'이라거나 '저게 뭐야' 했겠지만 춤 추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동감했으리라. 


이십대 후반 커플댄스 중에서 가장 담백하고 캐주얼한 스윙댄스(린디합)에 입문한 후로 라틴댄스에 대해서는 꽤 거리감을 갖고 대했다. 눈 돌아갈 만큼 화려하게 드레스업한 언니들, 굽 높은 슈즈, 정신없이 이어지는 스텝과 턴의 향연은 체력 좋은 청춘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년 전에 잠깐 스텝을 밟아봤다고 해서 살사를 안다고 할 순 없을 터. 2주간 춤을 추러 가보니 대세는 온원에서 온투로 넘어간 지(베이직 스탭과 강세가 달라졌다는 뜻) 오래였고, 그만큼 댄서의 연배가 다양해져 나이를 듣기 전까지 믿을 수 없는 ‘여전한 청춘’들과 새로 입문한 청춘들이 공존하는 세계였다. 그리고 내가 요즘 추는 바차타, 그 중에서도 주크댄스와 아주 비슷한 센슈얼바차타의 붐이 일어서 다시 추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여러 춤이 뒤섞인 커플 댄스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기 때문이다. 또 4.5센티의 샌들에 익숙해지자 이제는 6센티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체의 근력과 몸 전체의 밸런스가 생기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센슈얼(Sensual)은 관능적인 춤을 통칭하는 단어다. 상체가 거의 붙어서 추는 탱고와 그 영향이 짙은 키좀바, 그리고 라틴에서는 바차타와 차차, 그리고 스윙 중에서 무브먼트와 섹시함을 강조하는 웨스트코스트 스윙이 센슈얼 계열에 속한다. 춤 애호가답게 이것저것 추다보니 어느새 담백함보다 우아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센슈얼에 익숙해져버렸다. 몸으로 소통해야 하는 센슈얼 댄서로서의 매력은 연애상대의 매력과 밀접하지만, 허우대만 멀쩡한 사람보다는 한 곡을 아주 밀도 높게, 서로 소통하면서 추는 섬세한 파트너가 선호되게 마련이다.  


고수와 젠틀한 이만 살아남는다 


스킨십은 좋아하지만 안전한 스킨십이어야 해서 밤(유흥)의 세계와 친해질 수 없었던 내게 춤은 연애를 대체하는 아주 강력한 존재다. 사실 연애상대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혼자서 춤을 추러 가서인지, 아니면 뉴페이스인데 춤을 못 추지는 않고 잘 모르는 동작이 리드 덕분에 이뤄졌을 때 반짝반짝 하면서 좋아해서인지, 혹은 라틴계에서 선호하는 체구가 작고 리딩하기 편한 팔뤄여서인지 집적거리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한 곡을 즐겁게 추고 그럼 안녕~ 하면 그만인데 대놓고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는 분들, 거칠게 리딩하면서 ‘제가 좀 하그등요’ 어필하는 분, 그리고 어젠 나름 신선한(?) 플러팅을 받았는데 “편맥(편의점 맥주) 한 잔 하실래요?”라고 말하는 분도 등장.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시간이 늦어서요”하고 에둘러 거절했지만 사실 대놓고 말로 하는 편이 양반이다. 춤을 가장해 더듬거나 아주 부담스러운 동작만 계속해서 시키는 부류에 비하면. 


센슈얼은 어쨌든 야한 춤이고 허벅지가 밀착되거나 허리나 골반에 손이 닿는 일은 예사이기 때문에 서로 조심스럽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춤’이란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특히 바차타는 ‘연인의 춤’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다정하고 밀접한 춤이다. 센슈얼바차타의 고향인 스페인에서는 미성년자, 12세 정도의 아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추는 춤이라고 하니, 문화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아직 우리의 성의식은 갈 길이 멀다. 상대를 몸 자체로, 혹은 섹스할 수 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여겨야 더 나은 춤과 관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리딩을 위해 상대의 몸에 손을 대는 것과 본심이 시커먼 것의 차이는 춤을 춰보면 명명백백하다. 그래서 비호감으로 기피당하거나 춤판에서 퇴출되지 않으려면 야한 춤일수록 상대를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술자리에서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동의 없이 스킨십하거나 집적거리면 안 된다. 그러니 살아남은 고수일수록 매너가 좋은 것은 당연하다. 여성들이 꼭 잘 추는 사람을 좋아해서는 아니고 춤 경력이 오래될수록 세심한 리딩을 선호하게 된다. 



연애의 축소판 같은 파트너와의 3분


센슈얼 댄스의 느낌, 특히 딥한 홀딩이 상대에게 안기는 기분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럼 춤이 잘 맞을수록 속궁합도 좋은 거냐고 묻는데,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다. 파트너와 사귀어본 경험이 거의 없어 확언할 수는 없으니까. 동호회 같은 좀 안전한 바운더리에서 춤만이 아닌 상대의 평판을 듣고, 전 연인에 대한 정보까지 알 수 있다면 위험도는 더욱 낮아진다. ‘안전이별’이 화두인 이 와중에 나만 예외가 되리란 보장이 없다. 그러니 무작정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직진하기보다 예의를 갖춰 대하면 춤추는 동안의 합일된 느낌이 현실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 남성) 리더분들, 팔뤄들은 춤출 때 웬만하면 웃는 표정을 띠라는 강요를 받기 때문에 나쁘지 않으면 대개 미소 정도는 짓게 마련. 어쨌든 상대가 웃는 것은 춤이 즐거워서지 당신에게 꼭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랍니다. 그래도 즐겁게 춤추며 함께 3분의 소통을 거듭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재밌고 실제의 연애보다 고통을 안겨줄 확률이 현저히 낮으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여성과만 신뢰관계를 맺는 내게는 남성을 마냥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그러니까 사회적 존재이도록 해주는) 고마운 무엇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분간은 계속 춤에 홀릭할 테다. 더 많은 즐거움과 멋진 춤의 순간들이 오랜 나의 터부를 상쇄시켜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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