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를 깨는 공포영화 속의 독특한 캐릭터들
지난 번에 식인 악어가 등장하는 공포 재난 영화 『크롤』에 대해서 쓴 포스트에서 이 영화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으레 공포영화, 대개 외국 공포영화에 등장할 작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가 없다는 점을 꼽은 적이 있습니다. 흔히 공포영화의 단점 혹은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이지만 공포스러운 상황, 사람이 악마/귀신/살인마/괴물에게 위협당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저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해선 안될 짓을 기어이 하는 캐릭터가 나오기 마련이에요.
공포영화라는 것이 애초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상황이 많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작품 속에서 어느 정도 지켜져야 할 개연성은 있는 법이고, 굳이 저렇게 작위적인 상황을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위기 상황을 이끌어낼 수 있을 법한데도 정말 비상식적이다 싶은 짓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나와 공포보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정도가 지나쳐서 공포는커녕 황당함만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콰이어트 플레이스』 1편에서 소리를 추적하는 괴물들 천지인 동네에서 소리가 나는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놀다가 괴물에게 습격당하는 막내아들이나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 조심성이라곤 하나도 없이 행동하는 함선 내 인간들을 떠올릴 수 있겠네요. 진짜 무서운 것은 작중인물이 최대한 조심을 했음에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해를 입는 경우가 아닐까요?
반면 이런 클리셰를 깨어버리면서 영화 완성도의 참신함과 캐릭터의 매력 내지 그 죽음에 안타까움을 한꺼번에 연출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예를 들자면 식인 상어를 소재로 한 공포 영화 『딥 블루 씨』에서 배우 사무엘 잭슨이 연기한 러셀이 패닉에 빠진 일행을 향해 쓴소리를 하는 와중에 상어에게 공격받는 장면이 비슷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도 거하게 사고를 치는 인간이 나오긴 하지만, 은근 클리셰 깨는 장면이 많아서 인상적이에요.
또다른 예로 『크롤』에서 주인공 부녀를 구하러 온 경찰들은 악어가 나타났다는 경고를 받았어도 (밖에 있는 경찰은 아예 악어가 나온다는 경고를 듣지 못해서) 악어가 어디 숨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습격을 받기도 합니다. 경찰들이 악어 떼에게 습격당해 죽는 장면이 영화에서 제일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이지만 이건 정말 운이 나빴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공포영화라 기존의 장르 규칙을 따라간다고 해도 사소한 부분에서 클리셰를 바꾸고 상황 전개를 좀 더 납득이 가게 만들면, 작중 상황에 몰입이 더 잘 될 뿐만 아니라 캐릭터에게도 매력을 느끼고 응원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크롤』에서 주인공 부녀는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생존하려고 애를 쓰고, 기지를 써서 그 상황을 벗어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캐릭터이긴 하지만 저 두 부녀의 생존력과 근성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듯.
그리고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아예 가지고 노는 대표적인 영화로 『캐빈 인 더 우즈』가 있는데 『캐빈 인 더 우즈』는 젊은 대학생 다섯 명이 수상쩍은 조직의 제물로 희생된다는 클리셰를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다섯 명의 캐릭터가 기존 공포영화랑은 많이 다를 뿐만 아니라 악역으로 설정된 조직(SCP 재단)의 입장을 비춰주면서 알게 모르게 재단의 입장에도 공감하게 되는 기이한 효과를 발휘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건 따지고 보면 재단 쪽 인간들이 공포영화를 시청하는 시청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이기도 해서 생기는 효과인 듯한데요. 그래서 처음엔 재단의 비밀을 파헤치는 대학생 편을 들었다가도 저들이 이기면 인류 멸망이 확정이라 어떤 의미에선 재단에 이입하게도 되는 재미있는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결과는 둘 다 파멸이긴 하지만요. 대학생 주인공들도 재단 쪽 인간들도 납작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들은 아니라는 점이 특색인 영화이기도 해요.
※ 이 포스트는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다시 게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