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솔 Feb 08. 2022

분홍색 꽃만 보다가 놓쳐버린 봄

벚꽃 말고도 다른 봄의 모습도 바라보기


꽃 중에 라넌큘러스 하노이를 제일 좋아한다. 흔히 부케에 사용되는 것으로 연분홍색의 작약과 장미 사이의 모습이다. 하나당 꽃잎이 300장 이상이라는데 그래서 거의 하얀색이나 다름없는 얇은 한 장 한 장이 겹겹이 쌓여 분홍빛을 나타내는  참 이쁘다. 이렇게 이쁜 꽃을 떠받치는 줄기는 굵어서 튼튼해 보이며 싱그러운 초록빛을 뽐낸다.




학창 시절 내내 졸업식에선 라넌큘러스 꽃다발을 받았다. 시드는 게 아까워 몇 시간에 한 번씩 찬물로 갈고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다. 라넌큘러스가 있을 땐 매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니, ‘나만큼 이 꽃의 생김새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하고 생각하며 라넌큘러스와 친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혼자만의 감상에 잠겨 있는 채로 며칠을 보내다 보면 위를 향하던 얼굴은 하나둘 꽃병 밖으로 고개를 축 내렸다. 곧게 있다가 픽 쓰러지는 게 매번 의문이었다. 냉장고에도 넣고 물도 갈아주고 정성스레 돌봤는데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언젠가 라넌큘러스를 선물하려고 꽃말을 검색하다 꽃에 대한 정보를 보게 됐다. 다 아는 내용이어서 페이지를 나가려고 하는데 줄기에 대한 글을 발견했고 이내 놀랐다. 그저 굵어서 당연히 안도 꽉 차있을 거라 생각했던 줄기는 속이 텅 비어있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라넌큘러스를 사서 줄기 안을 들여다보는데 정말이지 꼭 누가 파낸 것처럼 가운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금세 꺾여버리고 말았던 예전의 꽃들이 생각났다. 냉장고에서 넣었다가 꺼낼 때, 물을 갈며 세심하게 다루지 않았을 때 쉽게 줄기가 꺾였던 거였는데 꽃잎들만 보다 보니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였다.




대학교 주변엔 한 카페가 있었다. 사장님이 매주 꽃시장에 가서 사 온 꽃으로 가득 공간을 채웠는데 가끔은 지난주에 있던 꽃이 새로 온 꽃과 함께 꽂혀 있기도 했다. 어느 날 사장님은 라넌큘러스를 잔뜩 사 오셨고 귀한 풍경을 놓칠까 싶어 부리나케 사진을 찍었다. 노트북 잠금 화면으로 해놓고 대학 생활 내내 조별과제를 하든, 영화를 보든, 수업을 하든 그 장면을 만나곤 했었다. 그렇게 수백 번, 어쩌면 수천번 봤을 수도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취업 준비로 끊임없이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쓰는 데 문득 지쳐 잠금화면을 켜놓고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 걸 라넌큘러스 옆에 있는 다른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 모르는 꽃이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홍색만 바라보다 놓쳐버린 것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고 보면 분홍색만을 열렬히 좋아했다는 의미는 다른 색들은 스쳐 보내기 바빴던 배경에 불과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그 순간들 속에서 행복했기에 이게 온전히 나쁘거나 안 좋다는 건 아니지만, 너무 좁은 세상에서 갇혀 살던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드러내기 어려운 취향은 보통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개념으로 쉽게 판단해버리고 단정 짓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내가 그걸 너무나도 좋아하고 내 세상은 그걸로 가득 차서 사람들이 보면 광적이라고 생각할까 봐 숨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보내온 일상은 분홍색으로 채워져 있어서 좋아하는 아름다움이 넘쳐흐르긴 했지만, 분홍색이 줄 수 없는 다른 색의 세계는 끼어들 틈도, 조화를 이룰 기회조차도 주지 않은 건 아닐까.




‘봄’이라면 역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벚꽃이지만, 옆의 개나리와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는 새싹, 우아하게 피어나는 목련까지 있어야 정말 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취향을 사랑이 어린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그 세계를 헤엄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 혹은 누군가가 정말 좋아하는 걸 궁금해하며 기웃거려 보는 건 어떨까. 아무리 살기 좋은 동네에 살아도 소풍도 가고, 여행도 가고, 드라이브도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끔 다른 데에 발 담갔다 오면 내 취향의 새로운 점도 발견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취향도 이해하고 세계를 더 다채롭게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래도 자신의 취향은 그 빛 그대로 변함없이 선명할 테니 걱정 말고 다른 취향으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와도 좋을 것 같다!


실제 노트북 배경화면. 라넌큘러스 옆의 노란꽃이 시들시들하다.


클라우드에서 가져온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식 꽃다발.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한다고 해도 다 좋은 건 아니에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