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과 학생, 미술관 큐레이터로.(5)

미술이론과 대학원 예술전문사 수료기

by 승주

4부에서 이어집니다.



1. 수업과 시간관리


4학기를 마친 결과이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성적이 올라간 게 뿌듯하기도 하다. 마지막 학기를 제외하고는 매 학기 5과목, 15학점씩 들었다. 학부생 때만큼이나 학교 수업을 위해 쓰는 시간이 많았다. 일선이라고 표시된 과목들은 학부에 개설된 수업이다. 비전공자라 들어야 하는 선수과목이 7개나 되었는데, 수료하고 나서 생각해 보면 더 들었어도 좋았겠다 싶을 만큼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학문에 익숙해지면 수업에 들이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까 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는 게 많아지니 준비할 것도 더 많아졌다. 과제를 할 때에도 뭘 모를 때에는 아는 범위가 좁다 보니 찾아볼 자료도 훨씬 적었다. 처음 수업 준비하며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은 온전히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학기쯤 되니 나름 배운 게 생겨서 그런지 수업이나 과제를 준비할 때 눈에 걸리는 내용들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익숙해졌음에도 수업 준비에 걸리는 시간은 같았다. 어떨 때는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 학기에는 졸업논문 워크숍을 빼면 3과목밖에 안 들었는데도 정말 바쁘게 한 학기를 보냈다.


1년 소감에서 적지 않았던 내용을 더하자면, 예술철학연구와 예술사화학연구 수업이 정말 재미있었다. 수업을 진행해 주신 선생님의 수업 방식이 너무 좋기도 했고 수업에서 다루는 주제와 텍스트도 내 취향에 딱 맞았다. 예술과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고, 예술사회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여러 논변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우리 학과 수업의 반 이상이 미술사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렇지 않은 수업을 듣는 게 더 즐겁기도 했다. 역사 수업보다는 철학 수업이 더 머리 굴리는 즐거움이 있지 않나.


세미나 수업은 늘 비슷했다. 수업을 듣는 학생이 비슷해서 그런지 수업의 흐름도 비슷비슷했다. 텍스트를 가지고 토론 비슷한 무언가를 늘 한다. 토론이라기에는 찬반이나 논쟁이 없고, 토의라고 하기에는 의견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보다는 각자의 생각을 펼쳐놓는 것에 가까운 그런 것들이 이어졌다. 좀 더 토론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갔던 수업은 동양미술세미나와 예술철학, 예술사회학 수업 정도였다. 물론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선생님의 수업 방식에 있다기보다는 학생들의 지식수준이 천차만별인 까닭이 아닐까 싶다. 심도 높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매 수업에 주어진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에 그 이상을 바라기는 쉽지 않았다.


2. 졸업 논문 준비

마지막 학기부터 졸업 논문을 준비한다. 1학년 2학기 때 지도 교수를 정하고 2학년 2학기 때 졸업논문 주제와 목차를 작성한다. 그리고 수료한 뒤 1년 동안 열심히 써서 예비심사, 본심사를 통과하면 졸업하게 된다. 내가 정한 주제는 예술 게임이다. 비디오게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고, 우리 학과에서 할 수 있는 비디오게임에 대한 연구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온 주제이다. 화이트큐브에서 제시되는 비디오게임들이 어떤 식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어떤 역사로 발전해 왔는지, 장르 혹은 매체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지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비디오게임과의 차별점을 논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 될 것 같다.


연구 주제는 보통 2년 정도 수업을 하면 얼추 그려지는 것 같다. "이게 너무 쓰고 싶다!" 하는 경우거나 "이거 아니면 다른 건 쓸 엄두가 안 나는데?"이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하다 보면 결정이 된다. 되는 것 같다... 다른 학우들은 어떻게 주제를 정했을지 잘 모르니 내 얘기만 하자면 나는 둘 다였다. 비디오게임에 대해 너무 쓰고 싶기도 했고 다른 주제로는 쓸 엄두가 안 나기도 했다.


이제 열심히 연구하는 일만 남았다. 방학 동안 리서치하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방학이 1주일도 안 남은 이 시점에서 진행사항은 0에 가깝다. 열심히 연구하기로 해놓고 열심히 쉬어버렸다. 벼락치기,,, 라기보다는 밀도 있는 연구라고 칭해주고 싶다. 앞으로 밀도 있는 연구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봐야지.


3. 미술이론과 예술전문사 수료 소감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처음 이 학과에 들어오면서는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나 자신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 시점에서는 큐레이터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미술을 처음 시작하면서 박서보 전시를 봤고, EAT 전시를 봤었다. 정말 미술사적인 주제들이었고 Fine Art의 영역에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2년 마치고 나서 드는 생각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걸리는 예술품의 세계 말고 대중문화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졌다. 공부를 하면서 동시대 미술의 방법론에 매력적인 접근 방식이 정말 많다고 느껴왔다. 그와 동시에 참 아쉬운 점이 그 좋은 방법론으로 분석하는 대상이 생각보다 슴슴했다는 점이었다. 영상 작업이라면 듄 같은 완성도였으면 하고, 미술관의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으려면 AAA 급 게임과 비교가 늘 되었다. 사진이나 회화는 여전히 엄청난 완성도를 자랑하지만 매체 자체가 주는 순수 재미의 체급이 수 세기 전과 비교해서 많이 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OTT며 게임이며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영화 관람 경험이며, 이런 새로운 매체가 주는 재미의 순수 체급이 정말 높아졌다. 뭐가 되었든 "우와...!"라는 소리가 나와야 그다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지향하는 바가 조금은 달라졌다.


졸업하고 나서 뭐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말했지만 미술관에 들어가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지만 그 영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이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게임 평론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게임 평론이라는 게 수요가 크지 않은 영역이라 그 영역을 얼마나 확장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동진 씨가 영화 평론을 유튜브로 하는 것처럼 그런 영역을 만들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현준 씨가 건축 평론을 유튜브에 올리고 이동진 씨가 영화 평론을 유튜브에 올리는 것처럼 게임 평론에도 그런 영역이 생기면 좋겠다.


그래서 여기에 진학한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공부라는 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만 해도 해도 부족한 점이 크게 느껴진다.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런데도 종종 미술 얘기를 누군가와 하면 뭐라도 대답이 척척 나오는 정도는 되었다는 점에 뿌듯함을 느낀다. 지인들과 전시를 보고 와서 전시해설을 한 뒤 큐레이터가 해당 전시에 대해 쓴 글을 읽을 때, 내 해석과 큐레이터의 기획 의도가 일치하는 상황이 많아지면 뿌듯함이 커진다.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을 무언가가 조금씩 되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2년의 시간은 그 정도의 시간이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한참 많이 남았지만 걸어온 길도 이제는 한참이다. 앞으로 성장할 영역이 많이 남았다는 점에 즐겁고 여태 걸어온 길이 나에게 보는 눈을 길러줬다는 점에 뿌듯하다.



추신. 몇 가지 팁

1. DeepL이라는 번역기를 활용하세요. 동기들 사이에서 안 읽고 읽은 척하기, 반만 읽고 다 읽은 척하기 고수로 소문난 저는... 번역기를 애용했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국문으로 읽는 것만큼 빠르게 읽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특히 훑어보며 내용을 빠르게 흡수할 때는 우리말로 적혀있는 글이 훨씬 좋습니다. 번역기 돌려서 한번 읽고 원어로도 한번 읽으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물론 영어 실력은 후퇴하지만요..ㅎㅎ


2. 다들 수업 시간에 노트북 쓰던데 저는 아이패드+공책 조합이 좋았어요. 우선 아이패드의 장점은 지하철로 오고 가면서도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읽으면서 밑줄 치고 메모한 걸 수업 시간에 그대로 볼 수 있어서 편해요. 물론 이 모든 걸 클라우드와 연동해서 쓴다면 노트북도 있고 패드도 있는 게 더 좋겠지만 저는 노트북이 없었거든요.


3. 과제는 듀얼 모니터로 하십쇼. 특히 4K 모니터와 함께하면 작업 능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과제 작성하는 창, 레퍼런스 1을 2분할로 메인 모니터에 띄우고 서브 모니터에 사진자료, 검색창 등을 띄워두세요. 그리고 책상 위에 아이패드를 세워둔 뒤 수업 시간에 다뤘던 텍스트를 띄워두면 동시에 수많은 자료를 다룰 수 있는 환경이 완성된답니다. 여러 자료를 동시에 훑어봐야 하는 일이 많아서 모니터는 많을수록 좋아요.


4. 책 스캔은 vFlat 앱을 사용하세요. pdf 추출이 유료이기는 한데, 매 학기 개강할 때 한 달 치 결제해두고 한 학기 동안 쓸 교재를 모두 스캔해두면 편합니다.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찾은 뒤 쓱 스캔하면 하루 만에 수십 권을 담아올 수 있어요. 스캔 한 파일의 공유는 불법이지만 도서관에 있는 책 중 필요한 부분 몇 장을 연구 목적으로 발췌하는 건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아마도요.


5. 있어 보이는 질문 말고 정말 궁금한 질문을 하세요. 진짜 배움이 깊어서 무슨 질문을 해도 핵심을 간파하는 그런 내공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사실 아무리 질문을 멋지게 포장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있어 보이게 포장하는 노력 대신 궁금한 걸 질문하는 쪽이 훨씬 나았어요. 저는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왜 스펙터클이 나쁜 거냐는 정말 어이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그 질문 덕분에 스펙터클의 사회를 직접 읽어볼 수 있었고 수업 기말 소논문의 핵심 방법론으로 채택할 수 있었어요. 비전공자라고 너무 기죽지 마십쇼. 그렇다고 비전공자인 걸 너무 티 낼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비전공자 출신이지만 언제까지고 겉돌기만 할 건 아니잖아요?


6. 미술사 공부는 정말 중요합니다. 미술사 연구를 하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미술사 공부는 너무나도 필수적이에요. 어떤 흐름이 있었는지 알아야 읽는 눈이 생깁니다. 저는 미술사를 무시했었거든요. 구닥다리 역시 공부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모르는 영역, 약점인 영역을 괜히 신 포도처럼 여겼었죠. 근데 그래서는 수박 겉핥기더라고요. 현대미술 할 거니 옛날 미술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어떤 역사가 지금의 미술을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면 지금의 미술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한정됩니다.


7. 기말 소논문을 쓸 때 보통은 본인의 연구 분야와 일치하는 내용을 쓰라는 조언을 많이 합니다만,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본인의 연구 분야와 거리가 있는 수업을 들을 때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주제를 잡아서 글을 써보는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그럴 때 아니면 언제 그런 영역을 들여다보겠어요.


저는 같이 수업을 듣는 동료들에 비해 배움이 깊지 않은 데다 성실함에서도 딱히 자랑할 만한 사람은 아니어서 제 조언이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처음 이 학과에 입학할 때 느꼈던 막연함이 주는 두려움을 다른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덜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적어봅니다. 제 경험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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