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민 취업지원 제도와 연계하여 구직 집단상담을 받았었다. 4일간 매일 6시간씩 열명 남짓의 또래들이 모여서 커리어 강사분의 수업을 들었다. 직업에 대한 가치관과 자아 탐색에서 시작하여 직무와 산업군을 탐색하는 방법,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는 방법까지 많은 내용을 배웠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간단한 모의 면접을 보기 위해 스스로 질문과 답변을 준비해는 시간이 있었고 나는 전공을 바꾸고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전공생에 비해 무언가 부족해 보일 텐데 그것이 내 가장 큰 약점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내 모의면접에 대한 선생님의 피드백은, 너무 오래전 일에 연연하지 말라는 의견이었다. 내게는 2020년이 엊그제 같은데 타인의 눈에는 너무 오래된 일처럼 보이나 보다. 준학예사 필기시험에 붙은 게 2019년 말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술관에서 2년 일하고 미술이론과 전문사 과정을 2년간 수료하고 1년이 좀 안되는 시간 동안 석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학부생으로 화학과를 졸업하기까지 걸렸던 시간보다 더 길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20대의 나는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틈만 나면 옛날 일을 꺼내보게 된다. 엊그제 동아리 후배의 결혼식에서 동아리 동생들을 만났었다. 그 친구들이 기억하는 나는 멋진 사람이었는지, 결혼식에 동석한 후배의 남자친구분께 내 설명을 죽 늘어놓는데 다 좋은 말들뿐이었다. "이 분이 고등학교 때 골든벨 최후의 3인으로 46번까지 풀고 미국도 다녀왔대, 이 분이 우리 동아리에서 사진 이론 수업도 매번 해주셨어, 원래는 무슨 공부를 하다가 지금은 무슨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데~." 20살부터 26살까지 있었던 일들인데다 그 기간도 졸업한 뒤로 흐른 시간보다 더 짧아졌다. 시간의 거리로 봐도 너무 멀어졌고 시간의 두께로 봐도 이제는 더 두꺼운 시기들이 생겨났다. 그런데도 나는 저 시간들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진다.
예전에 즐겨 하던 일들이 많이 사라졌다. 스무 살에 막 대학교를 입학하고부터 페이스북의 유행이 사그라들 때까지 페이스북에 사진과 글을 참 많이도 올렸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사진을 잔뜩 찍고 순간순간의 생각들을 짧은 글로 남겼다. 재밌어서, 좋아서, 그런 걸 하는 나 자신이 멋있어 보여서,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에 어울리는 행동들이라고 여겨져서 그렇게 했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사람들이 이사 가고 나서는 인스타그램에서도 비슷한 걸 했었다. 아마 3년, 4년 전까지는 그랬었다. 지금은 하지 않는다. 사진도 찍지 않고 글도 쓰지 않게 되었다. 내가 찍는 사진이 그저 그런 사진이 될까 봐, 내가 쓰는 글이 그저 그런 글이 될까 봐 겁이 나서 관둬버렸다.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 내게서 보이게 될까 봐 관둬버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넋두리 같은 글을 배설하듯 써 내려가고 누구도 보지 않을 뻔하고 의미 없는 사진을 산더미처럼 쌓아두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는 것들은 좀 더 멋진 것들일 거라 믿었다. 근데 문득 내 맘에 들 만큼 멋진 걸 만들어내려면 여태까지보다 훨씬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모든 걸 멈추었다.
예전에는 공략 하나 안 보고도 엔딩까지 잘 달려갔었는데 요즘은 게임 하나 시작하기가 어렵다. 뭔가 놓치는 게 있을까 봐 걱정되어서 제대로 진행을 못한다. 그래서 게임을 켜지도 못한다. 롤을 12년째 하는데도 솔로 랭크 점수 하나 받아두지 못하고 칼바람 나락만 여태 만 판을 했다. 좋아하던 건 서사와 연출이 어우러져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는데 정작 내가 하는 게임은 롤 같은 것들뿐이다. 핸드폰 메모장에는 쓰고 싶은 주제들이 쌓여만 간다. 글을 쓰려고 창을 켰다가도 금방 다시 꺼버린다. 유치한 글이 될까 봐 겁이 나서. 카메라를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는다. 서울을 돌아다니며 신나서 찍던 사진들도 이제는 다 뻔하게만 보인다. 내 눈에 멋져 보여서 나만의 사진이라는 생각으로 찍은 사진들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비슷한 구도의 사진이 몇만 장은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그래서 카메라를 놔버렸다.
어제는 동아리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대전에 내려갔었다. 예식이 끝나고 나서 뭐라도 하고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늦은 시간으로 예매했다. 세 시간 정도 갑천을 걸었다.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쉬고, 또 한참을 걷고 또 쉬었다. 기차 시간까지 너무 많이 남아서 걷는 내내 후회했다. 방황하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밤이 되어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깨어나니 한강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열차가 집에 도착하지 않기를 바랐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방황했다. 집 밖에도, 서울 바깥에도, 집 안에도 두려움이 가득하다. 용기는 사라지고 겁만 남았다.
용기가 있었던 적이 있을까. 나는 나를 믿는 만큼 자신이 있었을 뿐이었다. 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했었고 이제는 그 믿음이 꺾여버렸을 뿐이다. 용기로 나아간 게 아니라 자신감으로 나아갔었다. 자신감이 겁으로 바뀌었다. 그게 전부다. 무언가를 해냈던 나는 먼 과거에 있으니 그때만 자꾸 떠올린다. 이후로도 많은 걸 해냈는데 그건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아직 젊은데 어째서 빛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지내는가.
눈앞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을 때면 이 장면이 지금 내 눈앞에 흐르는 것처럼 사진 안에서도 그러하기를 바라곤 했다. 움직이는 사진이 있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서 짧은 영상을 많이 담았다. 영상을 이어붙였다. 올해가 지나가고 나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빛나는 시간을 떠올릴 때 저 멀리 옛날의 나 대신 지금의 나를 떠올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겁 대신 길을 찾게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