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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옥산 Mar 03. 2021

GIFT

2021년 2월의 일기

최근에서야 나는 또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걸 알았다. 마트료시카의 인형처럼 우물 밖에 나왔더니 또 다른 우물이 있었더라 인 셈이다. 지금은 고개를 들어 보이는 우물 밖과의 높이에 무력할 뿐이다.


이제서야 현실이라는 알을 깨고 나온 건가도 싶지만 기분은 넘쳐흐르는 락앤락 통을 어떻게든 욱여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이, 물 위에서 유영하다가 자연스럽게 귀가 잠겨 한참 멍했다, 화들짝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매 순간 울컥하고 번들거린다.


최근에 누군가에 의한 중산층의 정의를 들었다. 간절함을 못 느끼는 것. 비빌 언덕이 있는 것. 그저 한참 동안 멍했다. 여태 간절하지 않은 적도 없었지만 그저 짊어져야 할 언덕만 있다는 걸 잘 몰랐다. 그저 난 철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의 마지막 학력은 국민학교다.


열세 살 때부터 공장 용접 일을 시작해 낡아 해진 고무신만 신고 다녔다. 개발 전 늘어선 판자촌이 잇따른 종로구 장사동의 일대는 유일한 집 터였고 민주를 외칠 시간과 꽉 쥔 주먹이 없던 젊은 시절을 보냈다.



개천에서 용이 났던 과거 세대 속의 삶이지만 그 개천이 흙탕물이면 이야기가 다르듯이, 인색함과 이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천성 탓에 K-장남도 아닌 막내 벌임에도 집안을 거드느라 만년 일개미를 자처했다.



나의 어머니의 마지막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다.


종이 한 장 살 돈이 없어 허덕이는 가난에, 뒤에 태어난 남동생들의 미래를 위해 나이 열여덟에 방직 보세 공장으로 들어섰다.


그때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어라는 마법의 단어로 포장된 말도 안 되는 현실에 개인의 야망과 커리어는 천장에 고이 닫혀버렸다.


이 둘이 만나 성실히 삶을 이어나간 탓에 내가 태어날 무렵 자영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사업이란 모름지기 천성이 착하고 뻔뻔함을 모르면 호구라는 딱지가 붙는 게 당연한 건지, 경제 10분위 한참 밖인 형식상 중산층이나 정작 지표의 규모대로 살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유영하고 있다.


"10억 부자는 50억 부자를 보고 거지라 자칭하고, 50억 부자는 100억 부자를 보고 돈 없다고 하고 살아."


아버지가 내게 늘 하는 말이다. 재산에 삶의 기준을 맞추지 말라는 뜻이다. 본인은 몸이 상하지 않은 데가 없으면서. 비겁하기 그지없는 상냥함이다. 아버지의 회사에 근무하는 게으른 모 부장은 최근 아들에게 벤츠를 선물하고도 여유가 있는데 말이다.


매번 듣는다. 가난을 이번 대에서 끊고 싶다고. 그러니 이 나이에도 여행 한 번 못 가보고 고생한다고. 해외 한 발짝 나가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쉼도 없었던 두 분에게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이다.


이런 내 이야기를 듣고 해외 유학이나 정착을 준비 중인 친구들은 말한다.

"너 삶은 네가 사는 거지. 이 나라는 답이 없어.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해외로 나가."

"이해는 한다만 K-장녀가 그렇지 뭐. 그래도 그런 거 다 제쳐둬야 너 삶을 살 수 있어."


속으로 생각한다. 보호자가 노후 준비가 되어 있는 안정된 가정은 무엇보다 큰 선물이라고. 전폭적인 지원까진 아니더라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건 모종의 기회라고.


이런 기프트와 거리가  현실의 윤곽을 알수록 증식하는  덩어리를 똑바로 직시하기가 싫어 내면적으로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그러나  나물에  밥인지 외면하지 않아야함을  배워버린 탓에 나의 회피는 계속되고 있고  괴리는 꾸준히 나를 괴롭힌다. 그저 단순히 우물 밖으로 껑충  개구리가 되고 싶다.


꿩도 먹고 알도 먹고 싶다는 말이다.

  

아직도 나는 어릴 적 퇴근한 아버지의 손에 쇳내가 가득 풍기는 동전들과 "아부지 오늘 일당"이라며 멋쩍게 웃어 보이던 표정이 스친다. 급식 도우미를 오래 한 탓에 성한 곳이 없는 허리와 손에 난 습진 그리고 뜨거운 걸 오래 만져 웬만한 데임에는 감각이 없어진 어머니의 굳은살은 여전히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이렇게 기프트라는 단어로 입체적인 사유를 하며 연초의 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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