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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Jan 09. 2024

비혼 그리고 비출산에 대하여

‘나’라는 세계를 확장할 것인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옛 표어가 이토록 사치스러운 문장이었는가를 곱씹게 되는 요즘이다. 저출산에 대한 논의야 많지만 이렇다 할 실효성 있는 대책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세제혜택을 비롯한 각종 경제적 유인책을 쓴다 해도, 일단 나부터도 의문인 것이, 돈을 준다고 해서 아이를 낳을 마음이 생기진 않기 때문이다. 이미 낳을 결심을 한 입장이라면 정책적인 혜택을 입는 데 몹시 감사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심 이후의 말이다. 금전상 유인책을 출산의 동기부여로 삼기엔 어딘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 애초에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과업을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돈보다는 모종의 의미 부여, 과장을 조금 보태 사명감 같은 걸 심는 게 빠를 것 같다.


출산은 고사하고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볼까. 출산은 대체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후행적으로 따르는 요인이므로 결혼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나라 20대 성혼율은 7%라고 한다. 40대에 접어든 83년생 3명 중 1명은 미혼이라고 하고. 이 추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화되면 심화됐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 같다. 비혼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출산 가능 인구의 감소를 의미하므로 저출산이 발생하는 것은 순리인 듯하다.


종합하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가임기 인구가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를 낳을 동기부여가 충분히 생겨야 한다. 그러니 아이를 낳으면 보조금을 준다는 얘기는 그저 표면을 긁는 얘기에 불과하다. 조금만 뜯어보면 내부가 부실하기 때문에 결국 모조리 부수고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하는데, 문제는 어느 뿌리부터 구조 조정을 취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결혼과 출산, 이 모든 것에 대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피를 표하게 된 까닭은 무얼까. 그 원인은 외부적인 것(이를테면 내 집마련, 직장문제 등)과 내부적인 것(자아실현에 대한 의지, 출산 후의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 밑바탕에는 확장(expansion)에 대한 공포를 경험하는 세대가 다름 아닌 우리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뇌과학 서적에서, 무슨 책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과 깊은 유대를 맺은 타자를 통해 세상을 확장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예를 들어 애인을 만난다고 해 보자. 그는 타인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덧입힘으로써 어느샌가 ‘나’라는 자아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고통스럽다. 실제로도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이란다. 왜냐하면 그로써 확장되었던 나의 세계가 헤어짐을 통해 또 그만큼 잘려나가기 때문이다.


자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배우자는 선택의 영역일지언정 자식은 그렇지 않으므로 더하다. 내 몸에서 나왔기에 자식의 경우, 더 큰 일체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자식을 온전한 타자 인격으로 경험하지 못하기가 쉽고, 그 경우 소유물로 직간접적으로 여기게 되어 문제가 생긴다. (물론 배우자도 소유물로 간주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기는 매한가지다.) 즉 뇌과학에서는 이러한 통제 욕망을 타인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 ‘나’의 확장으로 동일시함에 잇따라 발발한다고 보는 것이다.


비혼과 비출산은 그런 측면에서는 자신의 확장성을 경험하지 않기에 딱 좋다. 단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고 온전히 내가 통제 가능한 범주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타인은 영영 통제 불가능한 범주에 있지 않은가? 즉 최선이라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차악이라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통제 불능의 영역까지 확장되어도 ‘괜찮다’라는 것은 영리하게 자라온 우리 세대가 그간 배운 바 없는 이야기다. 확장을 통해 뻗어나간다는 것은, 지평을 넓힌다는 멋진 이야기도 되겠지만, 어딘가 말단부에서 삐걱거릴 수도 있다는 무서운 이야기도 되니까. 더욱이 낙관론보다는 비관론이 팽배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세계의 확장을 선택하는 것이 과연 알맞은가 하는 고민의 지점에 놓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나의 세계를 확장할 여력도, 건사할 여력도 없다면 말이다.


어찌 되었든 저출산에도 명암은 있다. 201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리스토퍼 심스 교수는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의 절대적 인구 증가율과 인구 1인당 성장률에 관한 측면에서 봤을 때, 성과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평한다. 저출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애를 많이 낳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앞서 어떻게 이미 존재하는 인류 구성원들이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야 말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이야 말로 어쩌면 저출산의 특효약이 되어줄지도 모르고.


*Reference

https://n.news.naver.com/article/018/0005645522?sid=101

https://m.blog.naver.com/mrjsw0/223308679560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1076677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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