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와 『아버지의 해방일지』
소설가 정지아의 에세이인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처음 서점에서 마주쳤던 날, 책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매번 술을 마시기 위해 어떤 핑계를 댈까?'라는, 술꾼들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책을 펴 들고 첫 번째 장만 간단히 읽었는데도 단숨에 책에 빠져 들었다. 작가가 수배 때문에 숨어 지내다가 지리산을 잊지 못하고 2박 3일 동안 종주를 하면서 밤마다 마시기 위해 양주를 챙겨갔는데, 산장에서 정체를 들키고서 하룻밤만에 다른 등산객들과 술을 모두 나눠 마실 수밖에 없었던 웃픈 과거 이야기였다.
사실 이 책에 드러난 저자의 술 취향은 나와 정반대에 가깝다. 저자는 조니워커 블루 라벨을 특히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 술은 '블루'라는 애칭으로 전체 34개 중 7개 장에 등장한다. 또한 안주 없이 술맛을 즐기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게 마시는 걸 선호하고 혼술은 예전에는 전혀 하지 않다가 최근에야 조금씩 하고 있다고 한다. 양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술은 주로 맛있는 음식과 함께 할 때 마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혼술도 딱히 가리지 않는 나와는 취향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맛깔나고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해서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책에 있는 내용 중에는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라는 제목의 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 술자리에서 술이 맛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작가는 아프리카 초원의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가 자연적으로 발효된 사과주를 크고 작은 동물들이 주워 먹고 잔뜩 취해서 흥겹게 어우러져 노는 장면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인용한다. 단순히 술꾼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대는 핑계를 넘어서는, 격조가 느껴지는 술에 대한 예찬이었다. 반전은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서 실제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은 크게 실망을 했다는 사실인데, 작가는 '어쩌랴. 소설가의 기억이란 그따위인 것을!'이라고 눙치며 천연덕스럽게 글을 마무리한다.
책에는 작가의 가족 이야기도 가끔 등장하는데 이 내용만 봐도 작가의 부모가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작가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역시 제목이 눈에 확 띄는 소설이다. 사실 이 책은 작년 9월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작년 상반기에 인기를 얻었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에 영감을 얻어 제목이 지어졌다는 사실이 대놓고 드러난다. 이 책에는 무려 전직 빨치산 부부가 등장하기 때문에 손석구가 빨치산이 아닌 이상 그 드라마와 이 소설의 내용이 비슷할 리도 없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보니 단순히 제목을 차용했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할 만한 책은 분명히 아니라는 점이 느껴졌다.
소설은 아래 단락으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첫 단락이 얼마나 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화자의 부모는 과거 빨치산 활동을 했고 현재에도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화자는 이들을 한없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딸이다. 하긴 21세기에 사회주의라니 나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소설은 장례식 3일 동안에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지만, 문상 온 사람들과 아버지의 일화를 통해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한다. 그 과거 속에서 그저 인간을 사랑했을 뿐인 아버지의 참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빨치산, 사회주의, 유물론 등 무서운(?) 단어들이 난무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주제라고 하니 무거운 분위기의 책일 것 같지만 각각의 에피소드가 시트콤 장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웃기다 보니 책은 의외로 술술 잘 읽혔다. 단순히 웃기기만 하지도 않고 가슴 뭉클한 장면들도 자주 등장한다. 이 소설에 작가의 과거 인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저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면 자연스럽게 타고난 이야기꾼이 되나 의문이 들 정도로 자유자재로 독자를 웃기고 울리는 재주가 탁월하다.
정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소재 때문에 이 책을 외면할 독자도 분명 있겠지만, 결국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책이다 보니 모두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술 좋아하는 사람 중에 재미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농담이다.)
* 제목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