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긴장감이 공기를 지배하는 1월 말의 어느 날. 오후 2시가 되는 순간 회사 인트라넷이 마비된다. 대부분 직원들이 인사발령 파일을 보기 위해 동시에 게시물을 클릭하기 때문이다. 이후 부서별로 부서 내 인사 배치까지 완료되는 데 또다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제야 이동 대상 직원들이 전입희망서를 제출하면서 시작한 인사 시즌이 장장 두 달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한국에서 회사에 다닐 때는 이렇게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사발령을 1년에 두 차례씩 겪었다. 물론 모든 직원이 6개월에 한 번씩 부서를 바꾸지는 않는다. 사실 인사발령 자체는 회사에서 1년에 두 번씩 마르지 않는 가십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서 내가 대상자가 아니라면 책임 없는 쾌락에 가깝다. 그렇지만 내가 이동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팀에서 팀원이나 결재 라인에 있는 상사가 적어도 한 명은 바뀌므로 6개월마다 한 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에 실제 업무 수행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인사 시스템이기도 하다.
지금 회사에서는 아직 이렇게 도파민 넘치는 이벤트를 경험하지 못했다. 각 부서(department) 내에 인사팀이 구성되어 이동, 승진, 배치 등 전반적인 인사 사항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 조직 전체의 HR 부서는 급여, 복리후생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부서로의 이동은 철저히 부서 간 일대일 교환 원칙에 의해 시행되고 있었다. 예고 없이 부서 내 직원의 이동사항이 수시로 메일로 날아오는데, 이 메일을 보다 보면 이곳은 조직 내 전체 부서와 팀에서 인력시장이 항상 열려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업무분장도 상당히 유연한 편이다. 관리자의 허가를 얻어 본 업무 이외에 다른 업무를 함께 하는 직원도 많고, 가끔은 짧은 기간(6개월~1년) 동안만 업무를 할 직원도 공모한다. 특히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부서에서는 두 개의 국가를 담당하는 직원이 한 국가만 전담해서 맡는 직원들보다 체감상 더 많다. 총 37개의 국가가 있고 각 국가에는 분야별로 3명 이상의 담당자가 필요한데 인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규모가 작거나 경제적 중요성이 낮은 국가는 두 개씩 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나의 담당국은 지난 글(링크)에서 소개한 태평양 섬나라이다. 출근을 시작한 후 바로 다음 주에 이 나라로 결정이 되었다. 팀장(divison chief)은 우선 나라를 하나만 맡고 업무에 익숙해진 다음에 두 번째 담당국을 생각해 보자고 했다. 물론 그동안에는 이 나라 업무 이외에 전체 태평양 국가와 관련된 업무도 계속해 왔다.
이제 출장도 다녀왔고 서서히 한 국가의 업무 사이클이 마감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만큼 나의 두 번째 담당국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지금 회사를 8개월 정도 경험해 보니 놀라울 정도로 직원들에게 일 시키는 데 능한 조직이라 나에게 다른 국가를 아예 안 맡기지는 않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태평양 섬나라를 하나 더 맡기거나 아무 일이나 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아 팀장에게 간단히 의사를 표시하는 메일을 보냈다. 사실 내가 파견형식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원 소속기관의 의사도 이 결정에 중요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당연히 내 원 소속기관에서는 복귀 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중요한 나라를 맡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내용도 메일에 포함시켜서 두 번째 담당국은 태평양 국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팀장은 논의해 본 결과 보장할 수는 없지만 조심스럽게 낙관적(cautiously optimistic)인 분위기라며 추가로 상의해 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직원들이 반쯤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이 조직의 특성상 이 표현은 적어도 70~80% 정도의 확실함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 후 아무 소식도 없이 2주가 넘게 흘렀고 팀장은 4주에 걸친 장기 출장 중이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팀장이 출장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두 번째 담당국이 확정되지 않을까 싶다. 1년에 두 번씩 전 직원을 대상으로 속도전을 펼치듯이 인사 발령을 내던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이라 그런 건지, 이러한 속도는 많이 낯설다. 사실 이건 외교적인 표현이고, 실제로는 상당히 답답하다.
가만히 있으면 일을 덜 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냐는 타박이 나올 법도 하다. 가장 큰 이유는 원 소속기관의 입장에서 내가 파견된 이 자리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괜한 걱정이 아닌 것이 실제 몇 년 전에 이 자리가 그냥 사라질 뻔했다고 들었다. 파견 기간이 끝나면 원래 회사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 자리가 없어진다면 참으로 면목없는 일이라서 최대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추가적으로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비싼 이 나라에서 여름휴가 계획을 미리 세우기 위한 이유도 있고 (이건 어차피 갑작스러운 전쟁 때문에 항공료가 크게 오르면서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 일이 없는 상태를 잘 견디지 못하는 요상한 습성 탓이기도 하다.
조직 내 인력시장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이라 개인의 의사가 존중될 여지가 더 많지만, 그만큼 빠른 속도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점. 당연히 모든 면을 만족시키는 제도는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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