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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Oct 02. 2019

사이코패스

그들은... 정녕.... 고개를 들 수 없을까?


사이코패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라는 말을 즐겨 쓴다. 썩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지만 사람이 좀 이상하다고 여겨지면 여지없이 붙이는 것 같다. 정신의학에서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에, 진화심리학과 같은 학문에서는 "정신병질"이란 말로 대표되는 사이코패스에 대해 정신분석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범죄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영화 <추격자>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연쇄살인범은 사이코패스로 여겨지기 쉽다. 영화도 재미있었고 그 당시 유영철의 범죄가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것도 영화의 흥행에 큰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언제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떠올릴까? 혹은 자기 자신을 두고 '나, 사이코패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바로 감정이 둔해지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질 때다. 사이코패스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 <공감능력의 결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 위로와 공감의 전문가인 심리상담사들은 사이코패스의 정 반대 성격을 지닌 인물일까?

 그렇게 알려진 덕분에 신경증으로 인해서 감정이 좀 무디어지면 자기 자신에게 <사이코패스>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뒤에 생각하면 우스운 촌극에 불과하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꽤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전혀 없다.


 정신분석의 진단명을 통해서 사이코패스를 따져보자. 흔히 생각하는 사이코패스에게서는 이는 대상 리비도를 희생함으로 과대망상이 발달한다. 이때, 사이코패스의 공감능력 결여는 과대망상의 크기와 관계된다. 이때 과대망상도 단순히 엉뚱한 생각 수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세상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해야 한다. 이것은 <편집증>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유영철과 같은 범죄자가 검거되고 왜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던졌을까? 조승희는 왜 영웅시될까? 그것이 지니고 있는 메시지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 조차 그런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 메시지를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편집증자와 분석을 진행하는 경우,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 분석 시간 동안 온갖 이야기를 다하고 그에 대해서 분석가가 말을 좀 해주면 알아듣는 척을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현실적인 말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좋아지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데 마치는 시간이 되면 "어? 선생님 코털 삐져나왔네요?"라는 반응을 한다. 즉. 무슨 말을 하든지 별로 의미가 없고 사소한 것만 신경 쓰는 상황이 생긴다. 


 [추격자]에서 사이코패스들이 성관계를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지영민을 심문하던 범죄심리학자가 발기부전을 지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말을 들은 지영민은 처음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과대망상이 숨겨놓은 진실 때문이다. 그것은 부인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발기에도 대상 리비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과대망상의 발달이 신체적 변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데 사이코패스들이 발기부전이라는 말은 전혀 의미 없는 내용이 아니다. 편집증적 갈등이 발생할 때, 그것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에너지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면 환상의 마비를 불러일으켜서 성 충동의 실현을 막으려는 태도가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의 문제다. 사이코패스에는 이 기준점이 더 중요하다. 강호순이 그랬듯, 사이코패스들은 이른바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다. 자아는 초자아를 거스를 만한 에너지를 받고 스스로 법이 되려는 움직임을 취한다. 또는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지니고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다. 그들은 법을 집행하는 집행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런 경우에 <초자아가 없다>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폐쇄병동에서 말 안 듣는 환자의 진료일지에도 <초자아가 없다>는 말을 쓰는 의사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라도 초자아가 없다고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정신 장치들은 모두 갖추어진 상태에서 상호 역동적으로 관계들이 구성되고 그에 준하는 메커니즘들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막무가내로 정신 장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곤란하다. 

 정신분석에서도 야생 동물에게서 초자아가 관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현재 정신분석 연구를 하는 내 관점은 좀 다르다. 동물도 집단에 따른 명령체계는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사육되는 동물들은 기초적인 초자아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신경증이나 상상임신이 발생하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사이코패스들은 무엇을 쫓는가?

 흥미로운 것은 사이코패스에서 발기 문제가 등장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신체적인 문제일 것으로 생각한다.


 범죄자 이영학이 남성 확대 수술 실패한 이후,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아내를 가학 했을 가능성이 잇다. 수술이 때로는 신경증의 유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술 이후에 신경증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대체 왜 자신이 신경증에 시달리는지 거의 이해를 하지 못한다. 꼭 과거에서 그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 태도들도 관찰된다. 신체 문제로 촉발된 정신질환은 대부분 원인이 무엇인지 찾지를 못한다. 수술이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이미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된 상태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 임상을 다루고 연구를 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이 있다. 바로 그들에게는 <유혹>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을 유혹할 때, 남성의 환상이 자극되고 그 결과로 충동이 발생할 것이며, 사랑하려는 힘이 솟구쳐 오를 것이다. 그런데 사이코패스에게서는 그런 것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쟝 보드리야르는 유혹이 제거된 세계를 묘사하는데 사드의 <소돔 120일>을 예시로 든다. 영화도 존재한다. <샬로 소돔 120일> 이 영화는 무척 끔찍하고 온갖 변태적인 성적 행위들이 난무하는데 야하기보다는 역겨움의 향연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환상이 존재해야 유혹도 가능하다. 환상을 위해서는 검열도 필요하다. 

 이 세계는 초자아의 검열이 사라진 세계이다. 물론 현대에는 그런 내용들이 일종의 <자유정신>이란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검열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편집증적 상태와도 같은 것이다. 그 상태는 어지간한 수준에서는 도달할 수가 없다. 


  사실 사드 작품들 자체가 읽고 있는 것 자체가 역겹다. 도저히 인간이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할 지경이다. 사드의 작품을 보면 인간에게 검열이 없으면 어떤 역겨움을 견뎌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역겨운 세계에 사는 존재들을 사이코패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가끔 사이코 패스는 대화가 가능하니까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설득이 가능하려면 대상 리비도가 작동해야한다. 즉, 타인에게 에너지 투자가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인격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설득? 반응이야 할 것이다. 대신 그 말을 지켜야하는 이유를 모른다. 대화가 된다고 해서 설득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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