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세시공작소 Mar 12. 2020

나보다 한 살 많은 아파트

전셋집 강제 셀프 인테리어 수난기

직장은 수원이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라 30년 가까이 살았다. 장거리 출퇴근에 지쳐갈 무렵, 나는 한 신도시의 원룸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신도시에 지어지는 무수히 많은 신축 오피스텔들은 전세로 시작하여 계약기간이 끝나면 대부분 월세로 전환되었다. 나의 집주인도 그러했고, 계약기간 만료 3개월 전에 이사 여부를 물었다. 잠시 풀옵션 오피스텔에서 그냥 월세로 살아볼까 생각하다가, 주변 오피스텔들의 어마어마한 단칸방 시세를 보고 나는 이사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렇게 나보다 한 살 많은 아파트로 왔다.

수원에는 오래된 아파트가 많다. 그리고 오래된 아파트의 전세 시세는 신도시의 오피스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중에서 매매가가 전세가와 많이 차이나는 아파트는 대부분 재건축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가격과 등기부등본상의 문제를 제외하고, 집을 볼 때 나의 기준은 딱 3가지였다.

자전거 타고 출근할 수 있는 거리일 것

치안이 안전할 것

내가 손댈 수 없을 정도의 하자가 없을 것 (ex. 결로, 누수, 균열)


아파트들은 대개 구조도 크기도 비슷비슷했다. 확실히 오피스텔보다는 넓었고, 주방을 제외하고도 진정한 '방'의 개념이 존재했다. 내가 고른 집은 지저분했지만 큰 하자는 없었고, 집주인이 도배 같은 큰 보수는 해주기로 계약서상에 명시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하루라도 원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기에 어느 정도 사소한 셀프 인테리어는 각오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30년이 넘은 아파트는 이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사를 가자마자 나를 바로 현타 오게 만들었다.


내가 손댈 수밖에 없었던 것들

조명

조명을 LED로 바꿔주는 것도 계약서 상에 명시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사를 와보니 달랑 하나만 교체가 되어있었다. 중개사를 통해 항의하니 집주인께서는 "나머지는 아직 깔끔해서 국가적 낭비라 생각해 그냥 뒀다. 젊은 아가씨가 그냥 이해 좀 하고 써라" 일방적으로 말씀하시고는 전화를 딱 끊어버리셨다.


나갈 때 반드시 원상 복구하고 갈 것이다. 국가적 낭비니까.
화장실 조명. 왜인지 커버가 없었다. 눈이 부셔서 교체.

'본인이 사는 집이라면 이렇게 하셨을까?' 싶었지만 전세금은 이미 넘어갔고, 싱크나 도배 같은 큰 건 또 해주셨기 때문에 이걸로 문제 삼기도 애매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맘에 드는 예쁜 걸로 바꿨다가 다시 교체해놓고 가기로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나마 하나 교체하신 것도 셀프로 하셨는데, 불을 꺼도 잔광이 남는다는 거였다.

일단 맘에 안 드는 조명부터 교체한 후에, 2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 재조립

스위치는 꺼져있는 상태인데도 불이 늘 들어와 있었다. 다행히 잔광제거콘덴서 없이 해결되었다.

셀프로 조립할 때 너무 꽉 조립하면 프레임을 통해 누전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차단기를 내리고 해체했다가 재조립한 뒤 나사를 풀어주면서 좀 더 느슨하게 조립하니 해결되었다.


2. 스위치 교체

잔광을 유발하던 램프 스위치. 교체하면서 집안의 다른 스위치와 최대한 비슷한 디자인으로 맞춰주었다.

새로 교체한 조명에서도 잔광이 발생했다. 이 경우는 스위치 때문이었는데, 스위치 자체에 불이 들어오는 램프가 내장된 제품이었다. 이 스위치를 램프가 없는 것으로 교체하니 해결되었다.


수전

잔광만 잡으면 편히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려고 누우니 화장실에서 똑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샤워기 수전이 오래되어 물이 새는 거였다. 상당히 애매하게 한두 방울씩 새서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일단 샤워기 수전을 잠그고 며칠 동안 샤워는 헬스장에서 했다. 샤워기와 세면대 수전을 새로 주문하고, 이것을 교체하기 위해 몽키스패너를 돌리자 분수가 터졌다. 황급히 다시 잠그고 확인해보니 너무 오래돼서인지 내 힘이 부족해서인지 온수 쪽 부분은 밸브가 더 이상 잠기지 않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매일 퇴근 후 이 분수쇼를 반복했다. 집 전체의 수도를 잠가야 했다. 수도 밸브를 찾기 위해 싱크대도 뒤져보고, 양수기함도 뜯어보고, 소화전도 살펴보고 아파트를 여기저기 살폈지만 어이없게도 밸브는 집안 보일러실에 있었다.


수전 외에 부식된 세면대 트랩과 폽업도 함께 교체하였다.

물난리를 수습하고 수전을 분해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없었다. 다른 파츠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무슨 짓을 해도 풀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헬스장이 휴업하게 되어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결국 전문가를 불렀다. 오래되어 그런 것 같다며 기사님도 정말 힘들게 빼내셨다. (세면대는 거의 누워서 작업하셨다) 그렇게 피 같은 11만 원이 날아갔지만 잠은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환기구

어느 날 아침, 갑작스러운 담배 냄새에 눈을 떴다. 범인은 화장실 환기구. 환기구는 자연환기 방식으로 환풍기 같은 전기장치는 없었고, 뜯어보니 따로 연결되는 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용 배기구로 바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은근히 바람이 많이 불어왔다. 이 바람을 타고 담배냄새뿐만 아니라 다른 집의 음식 냄새와 각종 냄새가 다 넘어왔다. 오피스텔에서도 담배 냄새 문제는 있었지만, 환풍기를 틀면 심하지는 않았았는데... 냄새는 집을 볼 때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는데,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스트레스였다.


환풍구 바람을 타고 온갖 냄새가 넘어왔다
다이소에서 2천원 주고 산 퍼티로 새는 바람을 막아주었다

장치가 필요했다. 들어오는 바람은 막고 내보내는 바람은 확실하게 내보내야 했다.

그래서 환풍기를 설치하했다. 문제는 기존에 설치된 환기구도 제대로 벽에 타공을 해서 설치된 것이 아니라 그냥 벽에 뚫린 구멍에 꽉 끼워서 얹어놓은 정도였다는 것. 저 철로 된 틀을 빼내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일단은 들어오는 바람이라도 막기로 했다. 다행히 환기구에 붙어있는 댐퍼는 수동으로 닫을 수 있었다. 댐퍼를 닫고 옆으로 새는 바람은 틈새를 퍼티(빠데)로 막아주니 들어오지 않았다. 완전한 해결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냄새가 집 까지 퍼지지는 않.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만 오늘은 찾지 말자.

자잘한 일들남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들은 일단 해결했다. 제 집에 들어오면 편히 잠들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이사 와서부터 한 달 정도 고생한 것 같은데, 주말과 평일 퇴근 후에 조금씩 하다 보니 더 오래 걸린 것 같다. 방 한구석에는 남은 부품과 잘못 주문한 부품들이 여전히 널브러져 있지만, 나머지는 조금씩 천천히 정리해보자. 앞으로 2년 동안 잘 부탁합니다 아파트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