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앞니가 시리다. 치과인들을 위해 굳이 특정해 보자면 32번 치아 절단면, 그러니까 왼쪽 아래 앞니 윗부분이 시린 것이다. 그렇다고 차가운 걸 먹을 때 시린 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징’하고 ‘웅’ 하는 느낌으로. 내가 적었지만 징-이란 표현은 불편감을 드러내기엔 미진하고 또 상당히 간지러운 말이다. 내게 환자가 “이게 아픈 건 아닌데 가만히 있으면 징- 해요.”라고 하면 어떻게 응대했을까. 왠지 그냥 집에 가시라고 했을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충치는 원래 없었고, 씹을 때 통증이 유발되나 확인해 보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특별히 깨진 부위도 없으니 도통 원인을 모르겠다. 옆자리에 앉은 직장 동료, 졸업은 2년 후배지만 나이는 5살 형인 선생님에게 물어본다.
“선생님, 이상하게 딱 며칠 전부터 앞니가 시리네요.”
“그거, 나이 들어서 그래요. 저도 딱 서른부터 앞니가 시렸거든요?”
기억을 되짚어보면 내 사랑니는 딱 스물에 아팠다. 윗 사랑니는 그때 일찌감치 빼버렸고, 아래 있던 매복사랑니는 5년이 지나고 같은 학번 동기한테서 뺐다.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던 그 형은 그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다음 해인 서른한 살에 결혼을 하고, 서른둘에 쌍둥이의 아버지가 된 그 형과는 졸업 후에도 가끔 식물 사진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했다. 그러다 보니 5년이 흘러서 나도 그 형이 돼버린 것이다.
서른 하나에 결혼을 했으니 아마 그 형은 서른 쯤에 상견례를 한 것일 테다.
서른부턴 노산이래, 평균 결혼 연령이 서른둘이래,
충고도 폭력도 아니지만 - 그렇다고 팩트라는 비겁한 단어로 묻어가기엔 조소와 안도가 범벅인 말들을 차치하고서 그 형은 꽤나 어린 나이에 어려운 결심을 했다고 생각햔다. 그러니까,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하는 제도에 예속되기로 결정한 게 겨우 지금의 나라는 거잖아.
무언가를 하기에 알맞은 나이 - 그것에 절대적 기준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얼마 전 결혼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모바일로만 청첩장을 전달한’ 동창이 축의금을 너무 많이 넣어서 놀랐다고 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가 사실 그런 건 기준이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 개굴개굴 거리다 “봉투에 20만 원 냈던데?”라는 말을 듣고서 이구동성으로 음, 많이 냈네,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는 갈림길의 관계에 긍정의 불씨를 지필 수 있는 절대적 금액은 겨우 20만 원인 것이다. 아, 누가 나이에도 이런 유한 기준을 잡아주면 좋으련만.
나이가 들었다는 말에 화가 나거나 혹은 나이를 체감하며 불안해하는 것은 오히려 기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스물한 살의 재수생은 늦었다 생각하고, 스물여섯의 군인은 늦었다 생각하고, 서른다섯의 독신은 늦었다 생각한다. 서른 살의 누군가는 스물여섯을 보고 참 젊다고 생각하며, 혹은 서른넷을 보고선 늙었다고 생각하며 조언이나 안도를 할 것이다.
스물둘 엔 스물이 부럽고 서른 엔 스물넷이 부럽다. 어쩌면 우리는 원하는 시간에 하필 반 발짝 빨리 도착해 왔던 거라 생각한다. 도착해 항구라 생각했던 곳도 사실 바다 한가운데 둥둥 뜬 부표인 것이다. 착각하는 매 지점마다 엇비슷한 후회를 물에 던져 넣으며, 그렇게라도 터질 듯한 머릿속을 비워내야 가라앉지 않는다. 제 딴에는 노를 젓고 키를 잡아 항해를 한다 생각하겠지만 웬걸, 우리는 모두 거대한 해류를 타고 같은 지점으로 쓸려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다 같이 나이 먹어가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유난히 적막하고 외로웠던 연말이었다. 여느 때처럼 장을 넘기면 무언가 달라지리라 희망하면서 맞은 겨울 찬 바람이었다. 아빠 손으로 열 번, 내 손으로 스무 번쯤 12월 페이지를 넘기며 알게 된 새침한 사실은, 달력이란 우주의 시간에 제멋대로 선을 긋고 인간이 박아 넣은 숫자 칸에 불과하다는 것. ‘무언가’를 바꾸는 건 달력을 넘기고 떠오른 빨간 잉크가 아니라 숫자에 딸려온 경험과 중압감을 지혜와 책임감으로 일궈낸 생각과 행동이다. 자동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란스레 떠들다 과장된 웃음이 살짝 잦아들 때쯤 누군가 ‘올해 네 목표는 뭐니’ 같은 질문을 던지면 신년 술자리는 도란도란하게 분위기가 바뀌곤 한다. 떠내려가는 배에서 마냥 노를 젓던 나도, 이제 어떤 짐을 던져내고 또 무얼 바다에서 건져 올려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스무 살의 사랑니는 사랑을 알 나이라고 붙여줬다는데, 서른 살부터 시리기 시작한 앞니는 무얼 얻게 된 대가로 내어준 지표일까. 질척한 선전 문구가 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만 또래끼리 뭉쳐서 외치는 중이다. 또 정말 그렇기도 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숫자를 향한 관심과 활용만 늘어났으니까. 미성년의 술집 민증처럼 1월 1일을 기점으로 풀린 ‘시린 이’ 증상을 몸소 느끼며, 잘하게 된 것을 짚어보면 냉소, 눈치, 계산 - 그런 쌀쌀한 숫자들이 떠오른다.
주변에 스무 살 때로 돌아가겠냐고 물어보면 다들 무조건 간다고 아우성이다. 왜냐고 물어보면 가서 아파트 사야지, 엔비디아 사야지... 회귀물에 너무 많이 노출된 탓에 혹여나 그런 사태에 대비해 로또 번호라도 미리 외워놔야 했었는데 요즘엔 비트코인 덕에 그 정도 상세한 기억력은 필요 없는 것 같다.
대신 어쩌면 내가 막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사건을 머리에 넣었다. 아이들이 바다에 가라앉은 일, 핼러윈 이틀 전 하얗게 질리도록 깔린 사람들, 휴가에서 돌아오는 가족을 실은 채 폭발해 버린 비행기... 또 뭘 더 넣을까, 아니 뭘 더 넣어야 할까 생각하다가 울적해져서 그만두기로 한다. 나도 정상은 아니다.
‘다시 똑같은 삶을 반복해서 산다고 해도 다시 돌아가겠냐’
젊음과 세월의 소중함에 대해 물으려면, 계산을 딱 빼고 이렇게 해야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누군가 내게 스물로 돌아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삶을 다시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역시 예스-란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강물에 던지고 싶은 순간이 아주 많았지만 나름 괜찮게 살아온 10년인 셈이다. 스물은 이가 시린 서른에게 그만큼이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다.
4개의 매복 사랑니를 전부 다시 뽑아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