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원장 옹들(1)

by 이원장


요즘 커피를 갈아 내려마시는 것이 낙이다. 굳이 갈아, 내려, 마신다고 하는 것은 어째 마시는 일보다 갈고, 내리는 일에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하도 아침 커피는 마시지 말라고들 하여 - 호르몬 체계가 무너진다나 어쩐다나 - 버티고 버티다 오전 11시를 전후해 원두팩을 쓱 꺼내서 지퍼를 연다. 일주일 전에 지인이 파는 원두를 대용량으로 산 탓에 열심히 갈아 없애는 중이다. 저번 주부터 속쓰림이 잦은데 아마 이 녀석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갈아-내려-마신다에 동사 하나를 더 추가해 보자면 ‘나눈다’ - 그러니까 요즘 낙은 커피를 갈아-내려-나눠-마시는 일이라고 해야겠다. 내열 유리 커피 서버를 들고 ‘커피 주문 하셨다고요’ 너스레 떨며 위생사 분들께 드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내 낙을 함께 하는 분들은 바로 좌우 옆 자리 원장님들이다.



혼자 마시기엔 조금 과히 30g 원두를 넉넉히 갈고, 푸어링이 익숙지 않은 탓에 400ml 즈음으로 짜게 내린다. 원두를 핸드 그라인더에 담아 분쇄도를 맞춰 사르륵 갈고 있으면 방에 커피 향이 그윽하다. 드리퍼에 담아 커피물을 내리기 시작하면 꽤나 멀리 복도 건너 수술방까지 향이 퍼지는 모양이다.


암컷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누에나방처럼, 수술 원장님은 향을 맡으면 종이컵을 한 잔 뽑아가지고 와 착- 제게 커피를 주세요! 하신다. 나는 아유 네, 오늘은 좀 고소한 놈으로 진하게 내려보았습니다, 한다. 그럼 또, 아이고 뭐든 좋습니다, 제 혀야 그저 좋은 게 다 좋지요, 하신다.



다른 원장님 책상엔 늘상 머그잔이 놓여 있어 의자를 스윽 끌어 다가가 원장님 커피 한 잔 하시렵니까, 하면 된다. 그러면 늘상 ‘예 - 주십시오’ 하시는 것이다. 조르륵 따라 내려드리고 있으면 ‘예 - 감사합니다(이만큼 양이 적당하다는 뜻이다)’ 하시고 꼭 한 모금을 넘기고 나서야 짧은 감상평을 내놓으신다. 요번 거는 확 고소한 것 같어, 저번 거랑 향이 거의 비슷한 걸.


그 원장님은 6시 퇴근할 때가 되면 항상 두툼한 키친타월 같은 종이 냅킨을 두어 장 겹쳐 책상에 깔고, 휴게실 싱크대로 가 머그잔을 씻고서 냅킨 위에 뒤집어 엎어놓으신다. 다음 날 아침 8시 반이면 물기가 다 마른 뽀송한 잔을 들고서 미지근한 정수 한 잔을 하실 것이다. 그러고 다시 열한 시가 되면, 원장님 커피 한 잔 하시렵니까 - “예, 주십시오”.



나야 커피를 먹으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즐기려고 마시는 것이라 이런 경험 공유가 좋다. 점심을 후다닥 먹고 시간이 남으면 선글라스를 끼고서 주변 공원을 뛰다 온다. 정오에 삼십 분쯤 뛰고 돌아오면 하도 후끈후끈하니, 아이스커피로 드립을 내릴 요량으로 얼음을 찾아 휴게실로 간다. 짧은 바지에 러닝화, 선글라스를 쓴 채로 직원 휴게실에서 원두를 갈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유리창에 비쳐 보고 있자면, 양치질을 하고 들어오는 직원 분들이 흠칫 놀라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겨우 두 달 전에 병원에 입사한 나라는 원장은 아무래도 직원들에게 있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Positive)’ 싶은 사람일 거라 생각하며, 방금 아이스커피를 내린 서버를 들고 ’ 커피 시키신 분’ 소곤대는 능청으로 진료실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조공을 바치는 마음으로 무료 나눔 하며 직장 내 평판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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