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원장 옹들(2)
부담 없이 의미를 담기엔 양말 선물만 한 것이 없다. 양말을 생각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행사 증정용을 대강 신고 다닌 달지) 생뚱맞게 무슨 양말(?)이냐 생각할 법도 하지만, 이토록 꼭 필요하면서 특색 있어 기억에 남는 것이 어딨겠는가. 좋은 양말 한 켤레가 만원 이만 원 한다면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선물로 이만 원 삼만 원이라면 또 그리 큰 부담도 아니다.
아이가 막 태어났거나,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친구네에 집들이를 간다면 마음속에 그려 둔 그림이 있어 발걸음이 즐겁다. 즐겨 찾는 가게에서 파는 제품 중에 '엄마가 아이와 같이 신기 위해 만든' 양말이 있다. 마냥 새하얗지 않고 목화빛이 돌아 포근한 크루 삭스를, 13-23-27 사이즈를 해서 가져가는 것이다. 젊은 부부는 꼭 아기에게 양말을 먼저 신기고, 제 새끼를 보며 함함하다며 보기 좋은 호들갑을 몇 차례 떨고서야 자기들 발에 옷을 씌운다. 선물 포장을 뜯고 쪼르르 안방으로 달려가 세 가족이 같이 신고 나오면, 너무 감사해요 하시는 제수씨와 영문도 모르고 웃고 있는 애기 - 이 장면 만으로도 만원 짜리 양말은 그 값을 하는 것이다.
저번 달에 삭스타즈에서 여름 세일을 했다. 양말은 속옷이라 소모품이니, 그때를 맞춰 자주 신는 녀석들을 미리 사두고 또 궁금한 녀석들이 할인한다면 한두 개쯤 끼워서 주문해 본다. 진료 볼 때 신을 양말을 고르다가 같이 일하는 원장님들이 생각나 것도 같이 샀다. 얇아 감촉이 좋은 실크 양말 하나, 포근해 아무 때나 신기 좋은 면양말 하나씩. 백의민족 아니랄까 흰 양말(혹은 검정)만 신는 보통 한국인이 갑자기 발목에 색깔을 덮으려면 여간 어색해하지 않는다. 또 연배가 있으시니 과히 밝은 것도 미스다 - 나야 핑크 양말을 신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네이비, 그레이, 브라운 중 적당히 골라서 드리면 된다. 글을 읽으시는 독자 분들도 선물드릴 때 이렇게 참고해 보시는 건 어떨지.
자리가 세 개가 있는 원장실 가운데 자리에 내가 앉는다. 꼭 남자들이 화장실에선 모르는 사람 한 칸 떨어져 있는 소변기를 이용하듯, 먼저 근무하신 원장님들께서 중간을 띄워두고 양 쪽 책상에 자리 잡은 탓이다. 입사 막내인 내가 중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땐 좌우로 번갈아 보며 말씀을 드린다. 두 분께서 같이 말씀을 나누실 때면 나는 의자를 쭉 뒤로 젖혀 빠져, 얼굴을 편히 마주 보게 해 드린다. 오늘도 의자에 반쯤 누워 낮아진 시선으로 양 옆을 보고 있는데, 두 분 다 선물해 드린 그 양말을 신고 오신 것이다. 갈색 한 분, 회색 한 분. 나와 노원장님 나이 차이가 신혼부부와 그 집 애기보다 더 날 텐데, 내 기분은 어째 아이에게 토끼 귀가 달린 작은 양말을 신긴 새댁처럼 배시시 웃고 있다.
이르면 다음 달, 늦어도 다다음달이면 지금 병원을 떠나게 되었다. 100% 자의는 아니지만, 그냥 겨울 바닷바람 오기 전에 가는 것이니 안 춥고 잘 된 것이다 - 애써 생각하고 있다. 신발을 사주면 애인이 떠난다던 노래가 있었는데, 양말을 사드려서 내가 떠나가는 것인지, 괜한 선물을 했나 싶다. 매일 같이 커피를 내려드렸더니 원장님들께선 이제 커피는 어디서 얻어먹어야 하냐고 아우성이시다. 입맛을 고급으로 바꿔버려 건물 밑 커피는 먹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하시면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으면 헐레벌떡 컵을 씻으러 가시던 원장님, '원장님 커피 드시겠습니까', 하면 '예- 주십시오' 하시던 원장님.
원장님들은 나눠마시던 커피가 기억에 남으시려나보다. 나는 어째 양말을 신고 계신 두 분의 발목을 보며 혼자 흐뭇해하는 지금이 더 기억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