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5 파리에서
부산한 소리에 눈을 떠보니 전날 새벽 3시에 들어온 여독이 여전했다. 후드를 쓰고 거실로 나서니 밥을 먹는 민박 사람들이 먼저 있어 그 옆 소파에 앉아 잠을 깨며 차례를 기다렸다. 아침 메뉴는 소고기 뭇국과 청경채 돼지 볶음. 이제 막 일어났다는 이유로 잠결에 먹는 둥 마는 둥 하기에는 너무 따뜻하고 잘 차려주신 귀한 아침 식사였다. 장기 유럽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아침에 이러한 한식이 나올 때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브런치고 뭐고, 아침은 한식이 최고다. 소고기 볶음의 걸쭉한 국물을 밥에 올려 두 공기를 바닥까지 싹싹 비벼먹었다. 한식의 본질은 밥을 말거나 비비거나 볶는 것에 있는 게 아닐까.
12시가 체크아웃이라 친구와 각자 늑장을 부리며 짐을 쌌다. K는 잠깐 나갔다 온다면서 삼십 분 넘게 어딜 배회했는지 한참 뒤 숙소로 들어와 거실 밖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웠다. 나는 아침 샤워를 마치고 거실 식탁 옆 소파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척하며 민박 사람들과 담소를 나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들어서기 전 짧은 파리 구경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이 내게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치과대학을 6년 다니고 면허도 딴지 수년이 흐르다 보니,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전공을 밝히면 나오는 반응 유형을 몇 가지 분류하고 있다.
이 분은 <아, 그런데 제가> 유형이었다.
“아, 그런데, 제가 이게 진짜 엊그제부터 오른쪽 아래 사랑니 부위가 아픈데 ~ ”.
그는 며칠 뒤부터 순례길을 나서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병원을 가는 게 좋을지 염증 약이라도 먹어야 할지 감이 안 온다고 했다. 이모님께 부탁해 쇠젓가락 하나를 가져와 덴탈 미러 삼아 오른쪽 볼을 살짝 제치고 휴대폰 플래시로 치아를 밝혀 간단히 진찰해드렸다.
오른쪽 아래 사랑니(#48)가 반쯤 누워 맹출 되어있었는데, 구강 위생 상태는 양호했고 시진 상 특별한 염증이나 상처도 관찰되지 않았다. 살짝 두드렸을 때, 흔들었을 때 반응도 특별히 없었고 사랑니 뒷부분을 일부 덮고 있는 볼점막에 가까운 잇몸이 조금 자극된 정도였다. 큰 염증 이상이나 썩은 것은 없으니 새로 이가 나는 과정에서 자극되어 아픈 것이라고 설명하고 염증 안 잡히도록 구강 위생관리 당부만 해주었다. 별다른 처방도 치료도 없었지만, 그래도 큰 근심 안 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단 인사를 받았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사십구일을 걷는 순례길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고 방으로 들어가 남은 짐을 마저 챙겼다.
11시가 조금 넘어 아직도 숙소를 나서지 않은 몇 명 투숙객과 민박 이모님과 함께 와인잔을 몇 개 꺼내 어제 산 시드르(Cidre)를 따라 나눠마셨다. 전날 냉장고에 넣어놔 칠링이 잔뜩 된 시드르는 양조주 특유의 막걸리 비슷한 구수한 향이 베이스로 느껴지면서 향긋한 배와 사과향이 위로 올라왔다. 짙은 샴페인 빛깔의 시드르를 입에 머금으니 홍초를 한 두 방울 떨어트린 듯 시큼한 맛이 혀밑 침샘을 폭발시켰다. 이모님은 주방으로 가시더니 마른안주를 몇 줌 집어오셨다.
거실 스피커와 휴대폰을 연결해, 조금 유치한 그림이지만 영화 '노팅힐'의 OST를 틀었다.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의 'She'. 그 유명한 첫 소절이 나옴과 동시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따라 부르며 사람들과 잔을 부딪혔다.
‘She - maybe the face I can’t forget -’
휴 그랜트가 있는 서점 안으로 수수한 카디건을 잠근 채 들어온 줄리아 로버츠의 명대사가 생각난다.
“Don’t forget. I’m also just a girl, standing in front of a boy, asking him to love her.”
유치함은 함께 할 때 즐겁다. 또 유치하면 좀 어떤가, 잔뜩 각박해진 마음 조금이라도 유치해지려고 떠나는 것이 여행인데!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 공동묘지를 가보기로 했다. 마침 환승 없이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 술에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버스에 탔다. 이날 하늘도 푸르렀다.
페르 라셰즈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공동묘지로, 1804년에 만들어졌다. 19세기 이전 장례문화는 가톨릭의 영향으로 매우 보수적이라 묘지에 안장되는 데는 출신, 종교 등 각종 조건이 필요했다. 유태인과 집시를 비롯한 이방인들은 물론, 가톨릭 신자가 아니거나 신자이더라도 죽기 전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미사도 매장도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바뀐 시민의식을 밑바탕으로, 우리가 익히 아는 나폴레옹 1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페르 라셰즈의 문을 연다.
서양 근대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거나 파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폴레옹이 남긴 족적이 정말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단순히 프랑스 땅을 넓힌 정복자라기보다는 혁명적인 정치가에 가까웠고, 그는 전쟁에서 거둔 승리 때문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를 바꾸고 퍼트린 사람으로서 위대했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하고 압도적인 공포감을 자아낸 사람은 칭기즈칸이겠지만, 혁명으로 폭발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제도와 시설을 다듬어 현대까지도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몽골의 칭기즈칸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광개토대왕처럼 역사가 깊은 나라는 각자의 영토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웅이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쟁 영웅은 보통 해당 국가의 교과서에서나 중요한 위인으로 다뤄지지, 바로 옆 나라에서는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폴레옹이 세계의 위인전에도 등장하는 인물이 된 이유를 새삼 페르 라셰즈를 보며 느낀다.
로터리 방면에서 하차하여 조금 걷자 금세 페르 라셰즈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백팩을 메고 온 단체 학생들이 보였다. 무슨 체험 학습을 이런 곳으로 오나 싶다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한국을 떠올렸다. 우리도 학생들을 데리고 능(무령왕릉)과 총(천마총)을 보러 다니는구나. 하기야 왕은 아니어도 일반인 중 많은 유명인들이 잠들어있으니 이곳도 유적지라고도 할만하다. 쇼팽,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 등등.
막 문을 열고 유명인이 안치되기 전, 초반 페르 라셰즈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언덕에 위치한 탓인지 나폴레옹의 포부와 달리 정작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10년 간 겨우 2천 구의 시신만이 안치됐을 정도.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1817년 당시 프랑스 정부는 특단의 조치로 일종의 ‘연예인 마케팅’을 하는데, 프랑스 시민의 사랑을 받던 17세기에 사망한 극작가 몰리에르(Moliere)와 동물 우화로 유명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의 무덤을 페르 라셰즈로 이장시켜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바로 그다음 해부터 10배가 넘는 무덤이 생겼다고 하니, 19세기 묫자리 세일즈에서도 인플루언서의 힘은 빛난 셈이다.
파리 시내 도심에 있는 공원은 사람들이 풀밭에 누워 와인을 마시고 달리기를 하는 등 시끌벅적한 경우가 많다. 그러한 활기 찬 감각 가득한 일상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조용히 사색하거나 칸트만 한 철학은 아니더라도 생각을 정리하며 산보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처럼 동네 뒷산이나 조용한 공원이 적은 파리에선 이곳 공동묘지가 그러기 좋은 장소였다. 음악 없고, 말소리 없고, 엇비슷하여 자극 없는 풍경이 이어지는 나무 가득한 돌길. 이 날 페르 라셰즈에도 찾아와 뒷짐을 지고 산책하는 시민들이 보였다. 입구 초입 안내판과 구글 지도에는 유명인의 비석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지만, 목적을 둔 걸음을 하고 싶지 않아 대강만 위치를 기억하고 그냥 천천히 헤매며 둘러보기로 했다.
유명인이 많다지만 사실 이름만 겨우 들어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생보다 죽음을 먼저 마주하는 기분이 묘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은 아크릴 상자로 작게 경계 지어 보호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동성애를 하여 핍박받고 프랑스로 건너온 극작가. 그의 여성 팬들이 붉은 립스틱 자국을 아크릴과 비석에 남기며 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했다. 바로 옆에 붙은 경고문이 재밌었다.
<존중 없이(without respect) 흔적을 남기는 것을 금합니다. 모든 청소 비용은 가족들이 충당하고 있습니다.>
오스카 상(미국 아카데미 상)과 비슷해 괜히 기억에 남은 그의 이름 외에, 그가 한 명언을 하나 알고 있다.
“여자는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지, 이해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에겐 꽤나 도움이 되었던 말이다.
지나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물론 읽진 못했다)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의 무덤과 인상주의 화가 모딜리아니의 무덤을 봤다. 다른 곳보다 깔끔하긴 했으나 생각보다 수수하고 꽃 몇 송이 없는 그들의 무덤을 보니 영원하다는 예술마저 덧없게 느껴졌다. 오히려 유명인의 무덤을 볼 때보다, 길을 걷다 뜬금없이 꽃다발로 뒤덮인 일반인의 무덤을 마주쳤을 때 그들이 받은 깊은 사랑과 견실한 삶을 느낄 수 있었다. 나치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도 곳곳에 하나씩 위치해있었다. 그곳엔 <이름 없이 전쟁 범죄에 의해 생을 마감한 희생자를 위하여>라고 적혀있었다.
파리 코뮌(Paris Commune)의 벽으로 가는 길에 거트루드 슈타인의 무덤을 발견했다. 파리에 머물며 피카소와 마티스를 발굴하고 헤밍웨이가 드나들던 살롱을 운영하던 비평가이자 예술 애호가, 1920년대 파리 예술가들의 집주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등장하는 강하고도 섬세한 여성의 모습은 신기할 정도로 온데간데없고, 울퉁불퉁한 돌에 평범하게 새겨진 그녀의 이름만이 이 무덤의 소유주를 밝히고 있었다. 세계의 제왕들은 죽어서도 권위와 영생, 존경을 꿈꾸며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는데, 근대의 예술가들은 다 내려놓은 그들의 소박한 안식처를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 예술이고 뭐고 다 덧없는 삶이야. 그래도 살아있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살고, 주변을 사랑하며 살아.’
파리 코뮌이 마지막 항전을 벌이고 잡혀 총살을 당했던 벽에 도착했다. 그곳에 가니 네 명의 대학생들이 조별 과제인지,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리포터처럼 마이크를 들고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민의 공간이라 할 지라도 공동묘지인지라 ‘인증샷’같은 건 찍기가 부담스러워 나를 담은 사진은 하나도 찍지 않았는데, 왠지 이 벽 앞에서는 내 사진을 하나 남기고 싶어 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참이 지나도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바로 앞 계단에 앉아 그들이 진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마치 멀리로 비키라는 듯 우리를 쏘아보는 듯한 눈빛마저 느꼈다. 왕정과 외세의 침략에 항전하다 죽은 자유의 상징, 파리 코뮌의 벽 앞에서 그들은 어떠한 권리를 가지고 나의 자유를 제한하려 드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이내 돌아서 나왔다.
페르 라셰즈로 오는 길에 사람이 많아 점찍어둔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방문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한두 테이블만 빼고 꽉 채우고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아주 맛났던 점심 식사였다. 맛, 양과 가격, 서비스, 접근성(거리 및 웨이팅).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식당의 조건이다. 종종 지인들에게 저것을 모두 만족하는 집은 없으니 무엇을 포기할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 식당은 일주일 간 프랑스 여행에서 거의 유일하게 만난, 어떤 조건을 포기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모두 충족한 곳이었다.
수수하긴 해도 나름 짜임새 있는 메인 코스도 준비되어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단품을 시킬 수도 있었으나 [전채-메인-디저트-식후 음료]로 이어지는 런치 코스 메뉴가 있었다. 친구 K의 프랑스에서 마지막 식사이니만큼 푸짐하게 먹기로 했다. 생맥주 한 잔씩까지 해서 인당 20유로!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전채 요리로는 새우와 아보카도를 다져서 토마토 위에 올려낸 타르타르(Tartare)와 샐러드, 그리고 염소치즈 허니브레드가 나왔다. 새우아보카도타르타르는 가볍게 입을 즐겁게 해 주면서 신선한 느낌을 잔뜩 불어넣었고, 염소치즈를 사이에 낀 꿀을 바른 샌드위치는 고소한 단짠단짠의 정석이었다. 양고기를 구울 때 나는 특유의 우유, 치즈향을 좋아하는데 그와 비슷하면서 농축된 느낌이었다. 양과 염소의 특유의 냄새에 거부감이 있다면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흔치 않은 향이 즐거웠다.
첫 번째 메인 요리로는 붉은 돼지갈비찜 느낌의 굴라쉬(Gulyás, 헝가리의 진한 토마토소고기스튜) 비슷한 요리가 포슬포슬한 밥과 함께 나왔다. 고기가 조금 퍽퍽한 느낌이 있었지만 간도 괜찮고 소스의 맛도 좋았다. 질감이 좀 다르긴 했지만 한국 카레라이스 느낌으로 밥에 소스를 슥슥 비벼먹는 감성이 맘에 들었다. 친구는 곧 한국으로 가지만 나는 한국 밥이 5일이나 남았으니 비슷한 게 보이면 먹어둬야 한다.
두 번째 메인 요리로는 소 양지머리 스테이크가 나왔다. 이렇게 거대한 양지머리로 스테이크라니, 꺼릴 건 없지만 좀 낯설었다. 사실 양지머리는 한국에선 잘 구워서 먹는 부위가 아니다. 운동량이 많은 가슴살 부위이기 때문에 기름기가 없고 식감이 질겨, 소위 말하는 ‘입에서 살살 녹는다’와 가장 거리가 먼 정형 부위라고 할 수 있다. 대신 근육이 많은 만큼 살코기의 향미가 강해 오래 끓으면 고소한 육향이 우러나오기 때문에 국물 요리에 넣으면 풍미를 올리는 데 제격이다. 각종 국물, 전골 요리나 우리가 흔히 아는 평양냉면 육수를 양지머리를 이용해서 끓이며, 근육의 결대로 잘 찢어지는 소고기 장조림 정도가 한국에서의 활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두꺼운 스테이크로 구워 내오다니. 순수 근육에 가까운 부위라 그런지 굽기는 미듐 레어 정도로 나왔다. 나이프로 신중하게 근육 결 방향에 수직으로 조각 썰어 입에 넣었다. 알맞은 굽기로 구워낸 덕인지 걱정했던 것만큼 질겨서 여러 차례 씹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식감은 나름 적당했고 육즙과 향이 풍부했다. 함께 나온 소스와 감자 샐러드를 올려 곁들이니 한결 부드럽고 좋았다.
디저트로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올린 퐁당 오 쇼콜라(fondant au chocolat)가 나왔다. 바닐라 아이스크림도 괜찮고 꾸덕하게 올라오는 퐁당 오 쇼콜라의 촉촉한 맛도 훌륭했다. 같이 나온 에스프레소를 함께 마시니 고소하고 달달한 조화가 딱 좋았다. 이날 점심 식사의 문제가 있었다면 아마 우리의 위 크기가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가 적게 먹는 편이 아닌데도 메인 요리를 먹고 나니 디저트를 끝까지 먹지 못할 정도로 배가 불렀다. 맛있는 걸 남기고 가려니 마음이 아쉬웠다.
슬슬 친구를 파리에서 한국으로 떠나보낼 비행기 탑승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더부룩하지 않은 기분 좋은 포만감을 배에 넣고서 계산을 하고 식당 문을 나섰다. 이번 파리 여행 동네 맛집 분야 중 제일로 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