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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 Sep 26. 2022

굴비용위스키

1.

어벤져스 골프공을 한 팩 선물 받았다. Volvik과 마블이 협업해 색깔 공에 히어로 캐릭터와 심볼을 넣은 것이다. 드라이버 초보자라 툭하면 밀어치는 장외 홈런(파울에 가깝다)을 때려서 여지껏 만원에 열 개 들어있는 흰 중고공만 필드에 들고가봤는데, 선물도 마침 오늘 도착했겠다 -이게 패착이었다- 얼마 전 라운딩에는 기분 좋게 기깔난 공을 들고 가봤다.

Marvel X Volvic

결과는 처참했다. 방향은 물론 힘 조절도 잘 안되는 초짜라 시원하게 멀리 공을 옆으로 보내 물에 빠트리고 나무 무리로 사라지고, 다섯 공 중 세 개를 잃었다. 타노스도 핑거 스냅으로는 겨우 히어로 절반 밖에 못 날렸는데, 장갑끼고서 드라이버를 쳤으면 아마 전부 날릴 수 있었을테다.


“저런 선물 받은 이쁜 공 쓰시는 분 처음 봐요.”

‘뽈~!’ 크게 외쳐주시던 캐디 님도 한 번 칠 때마다 사라지는 공들이 아까우셨나보다. 선물 받은 거 아까우니 아껴쓰라고 옆에 있는 형들도 한 마디 씩 거들었다 그 중 한 명은 어느새 절반이 사라진 공 세트를 선물해준 형이기도 했다. 하하. 웃으면서 오늘의 명언을 뱉었다.


 “물건 아껴서 어따 씁니까, 물건은 쓰고 사람을 아껴야죠.”


코밑 쓰윽 닦고서 머쓱한 웃음 지었다. 나도 참 꿋꿋하게 할 말하고 남의 말 잘 안 듣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싹싹한 후배 쪽은 아닌 것 같다.

남자가 고개를 숙일 땐 컨시드 받을 때 뿐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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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people, and Use things. Because the opposite never works.]

사람은 사랑하고, 물건은 써라. 그 반대는 결코 통하지 않으니.

———————————————————————

<Minimalism>, 출처] Netflix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Minimalism>에 나온 말인데, 요즘 내 일상의 가치관을 가장 쉽게 표현하는 말이라 대화에 가끔 인용하곤 한다. 다큐의 제목으로도 쓰인, 패션 혹은 기타영역의 디자인 사조를 표현하는 의미로서 <미니멀리즘>은 사실 차별화된 어떠한 특정 형태군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무작정 집에 있는 것을 다갖다 버려 텅빈 공간을 만드는 행위나, 까만색-흰색-회색을 모노톤으로 배치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는 것 또한 더더욱 미니멀의 본질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이란 ‘기능성의 미학’으로,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필요한 것을 갖춘 형태가 곧 디자인이자 생활 양식이 되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적절한 사용이 이루어지는 것들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곧 미니멀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소비 성향을 포함한 일상 철학의 기본 틀은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be or To have)>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유냐, 존재냐>는 소유 양식의 삶만 바라보고 질주하게 만드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만의 페이스를 갖추기 위해 다들 한번 쯤읽어보면 좋겠다 싶은 책이기도 하다.

밑줄을 치다 포기했을만큼 공감이 가거나 머리를 깨부수는 도끼같은 구절들이 많았는데, 일일히 열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이어지는 글에서 짧게 각색-인용하는 정도로 생략하겠다

우리는 그토록 갈망하던 어떤 것(옷 등)을 결국 쟁취해냈을 때, 잠깐의 희열은 곧장 식어 창고에 처박혀 존재조차 잊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 공부, 혹은 독서랍시고 넘어간 페이지 수에 연연하며 소화도 제대로 못할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씹어 삼킨 적은 또 몇 번인가. 사상가의 이름과 ‘무슨무슨-주의’를 연결시켜 외우며 외주된 철학을 달달 읊는 것을 철학 공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또 어떻고. 그런 방식으로는 옷장은 그득해질지 언정 입고 나갈 옷은 없고, 퀴즈영웅은 될 수 있을지 언정 사상가는 되지 못한다.


위처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에리히 프롬은 ‘소유 양식’으로 규정하며, 우리에게는 진정한 삶을 위해 ‘존재 양식’으로서 태도를 바꿔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내가 일상으로 받아들인 '존재 양식’ 이란 이렇다 ; 원초적인 소유의 욕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삶을 변화시키는 선택을 지향하는 태도. 아래가 구체적 행동의 예시이다. 통용되는 정답이 아닐 수는 있으나, 나는 꽤나 만족하며 살고 있다.


- 옷을 살 때는 ‘갖고 싶은가?’ 보다 ‘잘 입고 다닐 것인가?’를 고민한다.

- 내 건강과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베개, 침대, 의자, 혹은 안전에 관련된 것들에는 과감히 투자하는 편이다.

- 원하는 것을 배우는 데에는 시간-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 여행을 갈 때는, 예상치 못하게 마주할 수 있는 경험들이 내 머리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 줄 것으로 기대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물론 가끔 생각없이 노는 휴식도 필요함을 안다).

인피니티 풀에서 찍은 사진을 ‘소유’하러 가는 호캉스, 평소 자기 옷스타일과 관계없이 자꾸 갖고 싶어져서 샀지만 몇 달 유행 지나 창고에 박힌 구찌 라이톤, 신지도 않을 것들을 모아놓은 조던 스니커즈 수집장 등이 내가 지양하는 소유 양식의 대표적인 예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것들은 내 삶에 적용되지도, 나를 바꾸지도 못한다.




3.

'굴비용 위스키'라는 말이 있다. 뚜껑을 따 마시기에는 좀 비싼 가격 때문에 케이스에 담긴 채로 바라만 보는 위스키를 일컫는 말인데, 나에게는 면세점에서 사온 20만원 대 이상의 위스키가 그에 해당한다. 먹지도 못할 것 굳이 왜 샀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표면적인 핑계를 대자면 면세점에선 비싼 술일수록 주류세 혜택이 커서 그렇고, 진짜 이유를 대자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무작정 갖고 싶어져서 샀다. 아니 그냥,

"이 은전 한닢이 갖고 싶었습니다."

Glendronach 21, 48%, 700ml


사진에 있는 글렌드로낙 21년이 대표적인데, 노징 노트와 시음 리뷰를 보고선 사고 싶은 욕구가 극에 달했던 물건이다. 공항에 들릴 일 있는 분께 부탁해 몇 달 전에 구매해놓고선 거실장에 진열하고 케이스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뿌듯해만’하는 중이다. 사실 내 위스키 장에는 한두 개 엔트리급 혹은 하이볼용 저렴이를 제외하고선 별로 까놓은 위스키가 없다. 아주 조금만 고가로 올라가도 전부 굴비가 되는 셈이다. 마시지도 못할 위스키의 수집, 이거야 말로 원초적 소유욕의 끝판왕인데 어차피 뚜껑을 딸 자신이 없음을 알면서도 이 욕망을 멈출 재주가 없다. 월든의 삶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한달 뒤 한국에 출시되는 글렌알라키 10cs 배치7', ‘제주 면세점 3월 넷째 주 싱글몰트 위스키 목록’, ‘무착륙 비행 신라 면세점 고숙성 위스키 탐방’ - 유튜브 알고리즘은 갈수록 보유하고 싶은 위스키만 늘려주고 있다. 신지도 않을 신발을 수집하는 사람을 공감하지 못 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가버렸다. 스니커즈는 KREAM으로 재테크라도 하지, 이건 진짜 팔지도 못하는 굴비다. 뭐든지 겪어보면 말이 달라진다. 나는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지고 싶어서 위스키를 모은다. 피규어 수집 정도는 매우 합리적인 취미로 생각될 정도.


한편으로는 이건 식품이 아니라 ‘아주 잘 디자인된 원기둥의 오브제’라고 생각하며 괜찮은 소비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다. 저 아름다운 숫자 21, 멋들어지게 휘어진 필기체의 Non-chill filtered, Highland Single Malt…… 금빛 케이스 뚜껑을 열면 마트료시카처럼 초콜릿 황금빛 액체가 담긴 영롱한 유리병 오브제가 나온다. 코로나 시국의 마스크처럼, 코르크 마개도 벗겨지지 않은 채가 더 아름답고 향기롭다... 상상을 이길 수 있는 감각 현실은 없으니까. 그래, 이건 로망의 오브제다, 존재로서 그 가치를 다하고 있다.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 술을 마시다 보면 저거 숫자 높은 거 오늘 까자고 하는 분들이 있다 - 발렌타인 21년 하고 비슷하냐고 물어보면서 말이죠(절대 아닙니다). 혹시라도 제 집에 오시는 분들은 저거 뚜껑 따자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취해서 따게 만들 생각도 마세요. 저거 먹으려고 산 거 아닙니다.


문구라도 붙여야하나싶다.


‘먹어도 인체에 무해하나 먹지 마세요.’


먹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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