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랍니다.
거실에서는 영화 소리가 들렸다. 남편과 두 아들이 함께 웃는 소리. 그 소리들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 속에는 '초등수학지도사', 'AI 학습코칭' 같은 단어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2025년 도입된다는 디지털 교과서 매뉴얼을 훑고, 제안서의 빈칸을 채우다 보면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좀 쉬지, 놀지 그래?"
남편이 문을 빼꼼히 열고 물었다.
"뭐 하면서? 술 마시고? 친구 만나고?" 또는 "뭘 하고 놀아? 술 마시고 친구나 만나라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남편은 친구가 많은 사람이고, 나는 친구가 손에 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알았다. 네가 좋아서 한다는데..."
문이 다시 닫혔다.
아마 그는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영화를 보고 함께 웃는 크리스마스를 바랐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스쳤지만, 내게는 지금이 더 절실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요 속에서 나는 오롯이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니라도 좋았다. 가족과 함께 웃는 시간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6년간 수학과 독서논술을 가르쳤지만, 이제 교육 현장은 AI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발 빠른 학원가는 ChatGPT로 학습 계획을 짜고, 초등학교에는 디지털 교과서가 들어온다. 나는 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26일이다. 나는 여전히 제안서 마감일들과 싸우고 있다.
그러다 문득 재능기부를 떠올렸다. 방배숲도서관의 재능기부 신청란이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이었을까?
'경력은 부족하지만 일단 시도해 보자'는 마음으로 강의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방배숲에서 피어나는 기록: AI와 함께하는 가벼운 글쓰기'
제목을 정하고 내용을 다듬으며, 나는 조금씩 힘을 얻었다. 15년간 아이들을 가르쳐온 경험과 최근 배우고 있는 AI 활용법을 결합하면 분명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의계획서를 마무리해 메일을 보내려던 찰나였다. 메일함 맨 윗줄에 낯선 제목이 도착해 있었다.
[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뭉클함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당장 달려가 이 기쁨을 나눌 이가 곁에 없었다. 발치에서 곤히 잠든 반려견 공주가 나의 작은 소리에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야, 엄마 작가 됐대. 엄마 글을 기대한대."
분명 시스템이 보낸 정해진 문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기대한다'는 말 한마디에 며칠간 굳어있던 마음이 맥없이 녹아내렸다. 세상이 나를 조금은 알아봐 준 것 같아 코끝이 시큰해졌다.
서류 탈락 메일만 받아오던 지난날들이었다. '해당 분야 경력 부족', '선정 기준 미달'... 15년 경력의 강사였지만 새로운 분야에서는 그저 초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작은 합격이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힘이 없었는데 힘이 나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기대한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까지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홀로 있기를 선택한 건, 단순히 제안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내 글이,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을 수 있다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대한다'는 말이 더 소중했던 것 같다. 시스템이 보낸 자동 메시지였을지라도.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메시지.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를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뒤로하고 일에 매달리는 모습이 외로워 보일 수도, 독해 보일 수도 있다.
거실에서 영화를 보던 남편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날 왜 내가 문을 닫고 있었는지 조금 더 이해해 줄까.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50세에 시작한 인생 2막. 누구보다 느리고, 누구보다 서툴다.
괜찮다.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아자아자 박소희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