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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프 Jan 25. 2023

비교적 짧은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67. 산책


적잖이 심심한 날이었다. 이 정도까지 무료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지레 늘어져 있으려니 뇌 어딘가에서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모스부호 같은 일정한 자극이 근육을 타고 입력되니 몸이 찌뿌둥하고 근질거렸다.


평소 나를 호출하는 친구들 없이는 굳이 밖에 나가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혼자 볕이라도 쐬리라 다짐하며 콤팩트하게 접어놓은 양말을 아무거나 꺼내 신는다.


어쩐지 들뜬 마음이 되자 밖에서 할 일을 한 가지 추가해 본다. 현관을 열고 나가면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야에 일일이 담아보기로. 최대한 자세히 진행하기로 한다.


잠금장치 해제 버튼을 눌러 문을 열자 바깥공기가 잽싸게 집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동반된 벽돌과 묘한 음식 냄새가 달갑지 않아 얼른 현관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자-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냐. 새하얀 이웃집 담벼락, 펜스가 쳐진 주차장, 삐져나온 능소화 나뭇가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골목길, 하수구, 그 주변에 떨어진 다른 종류의 담배꽁초들, 이른 시간에 배출된 종량제 봉투, 전봇대, 전깃줄, 도로명 표지판, 연파랑의 하늘, 몇 점의 구름, 그리고······.


큰일이다. 첫 시야부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담겨 그 자리에 몇 분 간 서 있어야 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올 텐데. 이대로라면 첫 골목을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들뜬 마음에 약속이나 다짐을 하면 안 되는 교훈을 얻고 두 번째로 할 일은 없던 걸로 한다.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대로변까지 나와 들러볼 만한 곳이 있나 머릿속 지도를 꺼내보았지만 딱히 끌리는 곳은 없었다. 새로운 카페와 상가가 들어서도 오히려 근처에 폐업한 가게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을 지경이었다.


너무 멀리까지 나가고 싶지 않았기에 목적 없이 한 바퀴 쭉 돌기로 했다. 걷다 보면 날 건드는 무언가 있겠지.


이변은 없었다. 동네를 쭉 돌다 보니 볕을 쐬는 목적만큼은 달성하였지만 그 외에 유의미했다 말하진 못하겠다.


욕조에 몸이 꽉 낄 정도로 살이 찌면 어떻게 될까, 하교하는 학생들의 가방에는 뭐가 들었을까 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며 걸은 결과였다.


어쨌거나 차분히 집에 돌아온 나는 손을 씻는다. 비누 거품을 잔뜩 내어.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거울을 바라본다. 좋은 생각이 날 것 같다.


음. 그래. 오늘 하루는 이렇게 마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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