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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원 Mar 11. 2021

노벨상을 빼앗긴 여성 물리학자, 기념우표에 오르다

거울나라의 물리 법칙을 밝혀낸 과학자

매년 2월 11일은 세계 여성과학인의 날(International Day of Women and Girls in Science)입니다. 2015년 UN 총회에서 지정되었고 2016년부터 매해 기념하고 있는 날이지요. 2021년 세계 여성과학인의 날에는 또 한 건 의미 있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바로 중국계 여성 물리학자인 우젠슝(吳健雄, Chen-Shiung Wu) 교수가 미국 우정청에서 발행하는 영구 기념우표(commemorative Forever stamp)에 선정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콜롬비아 대학 시절 우젠슝 교수의 사진입니다.


많은 분께 생소한 이름일 겁니다. 우젠슝 교수는 1912년 중국에서 태어났고 난징의 국립중앙대학에서 물리학 학사 학위를, 저장 대학에서 물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저장 대학에서 우젠슝을 지도했던 구징웨이 교수도 여성이었는데요, 그는 교수는 우젠슝에게 자신처럼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것을 권했고 우젠슝은 1936년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우젠슝은 미시간 대학교에서 여성들이 정문으로 다닐 수 없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우젠슝은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중국계 물리학자 위안자류(袁家騮, Chia-Liu Yuan)의 도움 덕에, 정규학기 개강 시기를 놓쳤음에도 다행히 UC 버클리에 무사히 등록하고 어니스트 로런스(Ernest O. Lawrence) 교수의 지도하에 박사과정 연구를 시작합니다.


로런스는 방사선 물리학의 대가였는데요, 우젠슝이 아직 박사과정 학생이던 1939년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합니다. 자연히 우젠슝도 방사성 원소를 연구하게 되었고, 인(phosphorus)의 베타붕괴 현상을 연구하여 1940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런데 무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지도교수가 추천서를 써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젠슝은 교수직을 얻지 못합니다. 당시 미국 학계에서 중국계 여성 과학자가 받던 차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지요. 우젠슝은 UC 버클리, 스미스칼리지, 프린스턴 대학을 전전한 끝에 1944년,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류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극비리에 추진하던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 계획이었습니다. 우젠슝은 UC 버클리에서 박사과정 학생이던 시절 다양한 방사성 물질의 붕괴 현상을 연구했었는데요, 우젠슝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최중요 연구원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라늄 분리/정제 기술을 개발하거나 원자로에서 중성자를 불필요하게 흡수하는 원인물질(Xe-135)을 규명하는 등의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우젠슝은 콜롬비아 대학의 조교수로 임명됩니다.



우젠슝 교수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기여는 1956년의 '우젠슝 실험(Wu Experiment)'입니다. 이 실험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반전성 보존(parity conservation)'이라는 개념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반전성 보존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뒤집었을 때(반전)에도 결과가 변하지 않는다(보존)는 의미입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반전성 보존이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왼쪽과 오른쪽을 뒤집고, 앞과 뒤를 뒤집고, 위와 아래를 뒤집고, 입자들이 움직이던 모든 방향을 거꾸로 뒤집었을 때에도 우주는 멀쩡히 작동할 거라는 가정이지요. 더욱 간단히 말해서, 우리 우주를 통째로 거울에 비춰서 만들어낸 '거울 우주'도 우리 우주의 물리학을 따를 거라는 가정입니다. 아래 이미지를 보실까요? (CC BY-SA 3.0, 출처: Wikipedia)


(좌) 거울 속 시계가 원래 시계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반전성이 보존되는 시계입니다. (우) 거울 속 시계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반전성 보존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입자가 네 가지의 힘(기본 상호작용)만을 주고받는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중력, 전자기력, 강한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인데요, 이들 중 약한 상호작용은 바로 우젠슝 교수의 전공인 원자핵 중성자의 베타 붕괴 현상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우젠슝 실험이 진행되던 1950년대로 돌아가면, 전자기력과 강한 상호작용은 '반전성 보존'을 따른다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약한 상호작용의 경우는 증명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약한 상호작용도 반전성 보존을 따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요.


1956년 6월, 물리학자 양전닝(楊振寧, Chen Ning Yang)과 리정다오(李政道, Tsung-Dao Lee)는 약한 상호작용이 반전성 보존을 따른다는 가설은 "실험 결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가정일 뿐(extrapolated hypothesis unsupported by experimental evidence)"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출판합니다. 이들은 또한 약한 상호작용의 반전성 보존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제안하는데, 이 실험 제안 부분은 우젠슝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The authors wish to thank M. Goldhaber, J. R. Oppenheimer, J. Steinberger, and C. S. Wu for interesting discussions and comments.). 이 논문에서는 약한 상호작용의 반전성 보존 여부를 직접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지는 않았지만, 당대 물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반전성 보존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 우젠슝은 양전닝과 리정다오가 제안한 실험을 실제로 구현하여 그 결과를 논문으로 제출합니다. 우젠슝의 실험 결과는 약한 상호작용은 반전성 보존을 만족하지 않는다고 아주 확실하게 입증했습니다. 이 논문은 1957년 2월에 출판되었고, 물리학계의 예상을 완전히 뒤흔들어놓는 한 방이었기 때문에 양전닝과 리정다오는 바로 그 해에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합니다. 그런데 석연치 않게도 우젠슝은 상을 받지 못합니다. 우젠슝과 거의 같은 시기에 비슷한 결과를 확인한 다른 실험이 있었고 노벨상은 최대 세 사람에게만 줄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노벨상 위원회에서 실험물리학자들을 모두 빼 버리고 이론물리학자 두 사람에게만 상을 줬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정확히 왜 우젠슝이 배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요. 어쨌든 우젠슝이 받지 못한 이 노벨물리학상은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노벨상 중 하나로 꼽힙니다.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우젠슝 교수는 이제 미국 기념우표를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자 기준으로 보면, 재밌게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확률보다 기념우표에 올라갈 확률이 훨씬 낮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기념우표에 얼굴을 올린 물리학자들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밀리컨 등 정말 쟁쟁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젠슝 교수의 우표가 발매된다는 소식을 들은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의 멜리사 프랭클린(Melissa Franklin) 교수는 "노벨상은 모르겠고, 우표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네요.


미국우정청 우표관리국장 윌리엄 기커(William Gicker)에 따르자면, 미국우정청의 시민우표추천위원회(Citizens' Stamp Advisory Committee)는 과학자의 얼굴이 들어간 우표를 더 많이, 그리고 다양성을 더욱 중시해서 발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우젠슝이란 이름은 분명 물리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생소하겠지만, 바로 그런 점을 노리는 거라고 하네요. 기념우표에 모르는 얼굴이 올라와 있으면 '이 사람은 누구고 어떤 일을 했을까?'하고 찾아보게 하는 것도 목적이라고 합니다. 우젠슝 교수는 중국계 여성으로, 인종과 성별 모두에서 소수자의 위치였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흔히 소외되기 쉬운 인물을 기념우표에 등재함으로써 소수자 집단의 구성원들이 롤모델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라는 것이겠지요.




사족 1. 당연하지만 반전성 보존 여부는 거울 나라의 물리학이 궁금해서 연구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현대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은 대칭성(symmetry)이란 개념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대칭성이란 특정한 변환을 했을 때도 물리법칙이나 관찰 결과가 변하지 않는 성질을 말합니다. 본문에 소개한 반전성 대칭은 '뒤집었을 때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말하고, 회전변환 대칭은 '돌렸을 때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말합니다. 대칭성을 다루는 수학 분야를 군론(group theory)이라고 하는데, 흥미롭게도 이쪽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정리 중 하나인 뇌터 정리(Noether's theorem)를 증명한 수학자 에미 뇌터(Emmy Noether)도 여성이었습니다.


사족 2. 우젠슝은 자신의 미국 정착을 도왔던 동료 물리학자 위안자류와 결혼하는데요, 이 사람은 사실 위안스카이의 손자입니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 총통을 거쳐 중화제국 황제를 자칭했던 군벌이지요. 위안자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전자의 전하를 측정하여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밀리컨(Robert Millikan)이었는데, 아무래도 물리학자로서 역량은 위안자류보다 우젠슝이 더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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