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정거장에서의 생활을 다룬 교육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주정거장이야 말할 것도 없이 미소 중력(microgravity) 조건이고, 끈으로 매달아놓지 않은 온갖 물건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곳이지요. 옆방으로 이동하는 법, 식사하는 법, 운동하는 법이 모두 다 달랐지만, 무엇보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법이 가장 충격적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소변이나 대변 덩어리가 떠다니는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다는군요. '화장실 기술'이 진지한 최첨단 과학 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우주공간에서의 화장실 기술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10월 12일 <The Atlantic>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무려 2,300만 달러를 들여서 여성들도 편히 쓸 수 있는 화장실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선 국제우주정거장(ISS)의 기존 화장실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알아볼까요? ISS 화장실의 공식 이름은 "배설물 수집 장치(Waste Collection System, WCS)"입니다. 이 장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대변' 부분은 조금 작기는 해도 일반적인 서양식 좌변기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특이하게도 깔때기 모양으로 생긴 '소변' 부분이 따로 있습니다. 두 부분 모두 진공청소기와 같은 원리로 배설물을 빨아들여서 별도의 탱크로 보냅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업로드한 영상을 보시죠.
굳이 진공청소기가 필요한 것은 우주정거장이 미소 중력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야 중력 덕에 대소변 모두 안전하게 변기에 집어넣을 수 있지만 우주정거장에서 별다른 장치 없이 대소변을 보았다가는 둥실둥실 떠다닐 테지요. 별로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진공청소기 팬을 켜는 부분이 수동이어서, 만약 실수로 팬을 켜지 않고 볼일을 본다면 여기저기 떠다니는 배설물을 어떻게든 정리하는 고역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좌변기는 보통 대변과 소변을 구분해서 처리하지 않습니다. 왜 우주정거장에서는 두 배설물을 따로따로 처리하는 걸까요? 우주정거장에서 물이 귀하기 때문인데요, 우주정거장 내에서 소비되는 모든 물은 정화하여 재사용된다고 합니다. 소변도 마찬가지여서 이를 따로 모아 화학적으로 정화한 다음 다시 비행사들에게 식수로 공급합니다. 여기에 대변이 섞여들어가게 되면 정화 시스템이 훨씬 복잡해지기 때문에 대변은 따로 모아서 정기적으로 대기권에 투하해 버리고, 이렇게 지구로 떨어트린 대변은 마치 소행성처럼 대기와의 마찰로 불타서 깨끗하게 사라지는 거지요.
문제는 남성과 여성의 '배설 신체구조'가 몹시 다르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남자는 앞으로 툭 튀어나온 음경으로 소변을 보기 때문에 변기에 앉아서 깔때기를 남성기에 잘 맞추면 별다른 불편 없이 볼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요도구와 항문은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깔때기를 맞추다가 대변기와의 접촉이 느슨해지면 배설된 대변을 변기가 빨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그렇다고 깔때기를 잘 집어넣지 못하면 소변이 둥실둥실 떠다니게 됩니다. 이건 애초에 화장실 설비가 여성의 신체구조를 반영하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이지만, 당장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그간 여성 우주비행사들은 말 그대로 임기응변과 노하우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 우주정거장 화장실은 '보편적 배설물 처리 시스템(Universal Waste Management System)'이라고 불립니다. 대소변을 불리해서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다는 기본적인 기능은 똑같지만 NASA는 개발 과정에서 여성 우주비행사들의 의견을 대대적으로 반영해서 여성들도 좀 더 편히 쓸 수 있도록 구조를 개선했다고 하네요. 더불어서 진공청소기 팬이 자동으로 동작하고 꺼지도록 사소하지만 중요한 발전도 추가했다고 합니다.
인류가 우주로 나간 역사가 이제 60년에 달하는데 왜 아직도 고작 여성용 화장실마저 개발되지 않았던 걸까요? 근본적으로 우주비행사의 성비 불균형 때문입니다. 소련에서는 무려 1963년에 여성 우주비행사를 파견한 바 있지만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는 1983년에야 나왔습니다. 미국 우주개발 역사에서는 이상할 만치 여성 우주비행사들의 숫자가 적었고 그에 따라 여성용 물자도 전반적으로 부족한 형편이라고 하네요. 예를 들어, 2019년 나사에서는 갑자기 우주비행사들의 우주 유영 계획을 변경한 바 있는데 여성용 우주복이 한 벌밖에 없어서 두 명의 여성 우주비행사를 함께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우주개발 예산을 삭감하면서 우주복 제작 계획도 줄였는데 이때 여성용 우주복의 여벌이 한 벌도 제작되지 못한 겁니다.
이번 우주 화장실의 개발은 변화하는 우주개발 분위기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보입니다. 현재 NASA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아르테미스 계획(Artemis Program)은 2024년까지 남녀 우주비행사를 달에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960~70년대에 미국이 추진한 유인 달 탐사 계획의 이름은 아폴로 계획이었고, 아르테미스는 아폴로(아폴론)의 쌍둥이 여동생이자 달의 여신입니다. 달의 여신의 이름을 따온 만큼 NASA에서도 아르테미스 계획을 추진하며 여성 우주비행사들을 세심히 고려하여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