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기록을 시작합니다.
기록은 해서 뭐 하나 밥이 나오나
뭐든지 주워다 갖다 붙이고 뭔가 쓰고 점점 채워져 가는 노트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나를 보며 누군가 이런 말 한 적 있다.
“기록은 해서 뭐해요?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뭘 이렇게 열심히 쓰고 있어요?”
올봄,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겪었다. 한동안 방 안에 앉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던 것 같다. 생계는 유지해야 하니 일은 겨우 했다.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출근할 때까지 어둑서니처럼 방에 앉거나 누워 있었다. 간간히 기별하는 우리 고양이들의 살랑이는 꼬리로 겨우 보내는 시간들이었다. 제대로 먹을 리가 없으니 한 달 사이 약 8kg 정도의 살이 빠졌다. 생각의 흐름이 꽉 막힌 채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자기들끼리 잡기 놀이를 하며 집 안을 날아다니던 우리 고양이들이 무언가를 툭 털어뜨렸다. 책장 맨 윗 칸에 예전에 정리해 둔 기록꾸러미들이었다.(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특한 고양이들이다) 활자 중독이라 할 만큼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글씨 쓰는 일도 좋아하는 나였다. 한동안 모든 것을 놓고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무언가 한 번 기록해 볼까? 하다가 겪은 아픔들을 조금씩 털어서 공책에 써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시 떠올리는 일조차 고통이었다. 꾹 참아가며 어떤 기억은 남기고 어떤 기억은 버려가며 공책 여백을 채워 나갔다. 공백을 채워 나가다 울기도 하고 엉망진창인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글자들을 듬성듬성 적거나 빼곡하게 적어가고 그 글자들의 배열을 보면서 묘한 안도와 안정감이 조금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누르던 고통들을 조금씩 객관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고 기록이 쌓아 다시 읽어 보며 되돌아보는 시간들을 가졌다. 점점 위안을 얻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는 혼자서 보는 기록으로만 끝내지 말고 인스타그램에 하나씩 올려 볼까? 하는 맘이 생겼다. 그럼 누군가 내 기록을 지켜보는 사람도 생기겠지? 그럼 더 꾸준히 기록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로워도 거의 없어서 내 이야기가 드러나도 크게 상관없었다. 매일 출석하듯이 하나하나 남기다 보면 내 고통도 어느새 수 그러 들거나 희석되거나 아니면 내가 지치거나 그중 하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래 일상 사진을 업로드하던 인스타그램 계정을 기록 계정으로 바꿔 기록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약 3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게시글을 올려보자 혼자 마음먹었다.
기록을 늘 하긴 했지만 막상 인스타그램에 게시할 기록을 한다는 건 그래도 누군가가 볼 수도 있으니 조금 달라야 할 것만 같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집에 있는 스티커도 붙이고, 마스킹 테이프도 잘라 붙이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루하루 기록 사진을 찍어 게시하는 일은 조금씩 나를 살게 했다. 에세이 형식의 글도 쓰고, 가끔은 단편 소설의 앞부분을 써 올리기도 하면서 꾸준히 기록해 갔다. 내밀한 이야기들을 공개적으로 올리는 일이라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정말 알려지면 안 되는 이야기들은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그저 이 정도의 고민은 살풀이처럼 써서 털어버리자 할 수 있는 정도의 선만 올렸다.
어느 날부터 팔로워가 느는 게 보였다. 조금 더 재미있어졌다. 댓글들에 위로하는 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내가 남기지 않은 행간의 이야기들까지 눈치를 채고 나를 걱정해 주는 댓글에 살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을 일었다. 그저 너무 힘들어 하나씩 털어놓은 이야기들인데 어떤 분들은 글을 잘 쓴다, 다음 이야기는 없나요 하며 공감을 해 주었다.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공간 속에서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상황들이 뭐라 말할 수 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원래 계획이었던 30일간의 기록 여정이 지났지만 기록에 재미를 붙인 나는 매일 하나씩 게시글을 올리며 봄에서 여름을 맞이했다. 글 근육, 기록의 근육, 마음의 근육이 생기면서 상당히 단단해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짓누르고 불면에 이르게 했던 고통도 사라졌다. 사실 사라진 것보다는 고통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달라졌다는 게 맞는 말 같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 지금은 겨울이다. ‘아무렇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고통 이전의 나에 가까워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혼의 성숙함이 추가된 벌크 업한 나를 만나고 있다는 게 맞는 것 같다. 모두 기록 덕이다. 기록을 하면서 덜 어내며 다시 쌓고 다시 덜어내다가 다시 쌓아서 마음 가득 기억하고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조절하는 상황이 되었다. 기특하다.
무슨 돈도 안 되는 기록이나 하고 있냐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멀뚱멀뚱하기만 했다. 사실 돈이 안 되는 일은 맞는 것 같다. 돈이 되기는커녕 돈이 더 나가는 일이기는 하다. 기록하려면 공책 사야지, 펜 사야지, 펜도 하나만 사면 되는 것도 아니라 구색을 갖춰야 하니 점점 더 많이 사야 한다. 가끔 스티커나 마스킹테이프도 기록의 꾸밈을 위해 필요하다. 나갈 돈이 더 많다. 돈이 되기는커녕 돈만 나가는 일인데 나는 왜 기록만 하면 기분이 좋을까.
나를 찾아 주었다. 기록이.
나를 슬픔에서 건져 주었다. 기록이.
기록이 뭐 그런 가치가 있나요? 하는 분이 계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질 좋은 공책과 펜을 선물해 줄 예정이다. 우리 함께 기록이 주는 무형의 가치를 느껴 보자는 마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