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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무씨 May 10. 2016

자발성과 비자발성

들뢰즈 개념어 제멋대로 해석 1

 좋은 인생에 대해 논할 때,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자는 말을 하고는 한다.

이 주체 말고...

자율적인 삶, 자발적인 삶, 주체적인 삶


얼마나 좋은 말들인가?

단순하게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즐기는 취미 생활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내가 먹고 싶은 것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가치있게 여기는 일을 하고,

남들에게 종속되지 않고,

나의 명령에 따르는 것.

수많은 "나"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말들 속에 포함된 개념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은 개념이다.

심지어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애초에 "나의 명령"에서 "나"란 누구, 아니 더 나아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그리고 파격적인 대답을 내놓은 것이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이다.

그에 따르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자발성이 아니라 비자발성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것이 남들의 노예가 되라는 뜻이 아님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는 애초에 "나"를 독립체로 인정하고 "나"의 밖에 있는 모든 것들과 구분하는 것을 꺼렸다. 그에 따르면 "나"라는 사람은 사실 "홀로 선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것들이 모였다가, 다른 형태로 분출되어 흩어지는 과정의 공간일 뿐이다. 어려운가?

다시 말하자면, 나의 수많은 느낌들, 감정들, 생각들, 선택들, 행위들은 "나"라는 주체에서부터 최초로 출발하는 자발적인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보통 자유의지를 말할 때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선택"이란 내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과는 별개로 나의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대화의 형식으로 옮겨보자.


들뢰즈: 만약 내게 선택의 동기가 없다면 애초에 어떻게 선택이라는 것이 성립하는가? 내가 오늘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는 대신에 피자를 먹었다면, 어쨌든 간에 모종의 동기가 있었기에 그러한 선택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 취향이나 이해관심이 없는 로봇에게 "무엇을 먹을래"라고 물어본다면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선택을 한다치면, 이렇게 의욕적 동기가 없는 선택을 진정으로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체철학자: 그러나 인간은 욕구와 반하여 선택을 할 수 있다. 칸트가 했던 말들을 상기시켜 보아라. 각 개인은 이해관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욕구를 절제하고, 이타적 행동을 할 수 있지 않느냐.


들뢰즈: 그건 애초에 "욕구"를 편협하게 정의한 것이다. 왜 "쾌락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한 "욕구"와, 행위 일반의 이러저러한 "동기"를 굳이 나누느냐. 나의 당장의 욕구를 반려하고 선택을 했을 때도, 모종의 "동기"가 작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통적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공통적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왜 이것이 중요한가? 동기를 가진다고 해서 자발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들뢰즈도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발적일지라도, 내가 무엇을 원하게 되는지는 그다지 자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을 때, 나는 왜 그것을 먹고 싶을까?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왜 그것을 갖고 있을까?

내가 어떤 음악을 즐길 때, 나는 왜 그것을 즐길까?


이에 대한 대답은 "차이"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경험의 차이"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험은 좁은 의미에서의 경험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생성되는 경험이다. 예컨대, 부모의 경험을 물려받은 DNA, 태아시절 어머니가 즐겨먹은 음식의 경험, 이유식, 기억에 강하게 각인된 날에 먹은 음식의 경험... 등등이 쌓여 나의 음식에 대한 취향을 형성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기제는 다르겠지만, 다른 모든 행동들도 기본적으로 경험들이 쌓여서 취향을 형성하고, 이러한 취향이 선택의 순간에서의 "느낌"과 맞물려 동기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행위로 나를 이끈다.


경험과 반대되는 말은 '선험(혹은 초월)'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진정한(혹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선험이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해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선험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플라톤이 말하듯이 그것이 현상세계의 경험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신체의 경험들은 유전자에 축적이 되고, 감정과 반응들의 경험은 문화에 축적이 되며, 소통의 경험은 언어에 축적이 된다. 경험들이 존재하는 양상은 "잠재적"인 어떤 것, 비물질적인 어떤 것이지만, 항상 물질세계를 "통하여" 전달이 된다. 결국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했던 경험들은 "나"라는 깔대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깔대기 속으로도 들어갈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경험"이 우연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한다. 내가 키가 작게 자랄 유전자를 갖게된 것도 우연이오, 내가 테니스를 시작하게 될 멋진 프로 경기를 보게된 것도 우연이다. 순간 순간이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결국 우리를 이끌게 된다.


들뢰즈는 순수 자발성을 배격했다. "나"는 나 이전에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물론 그 "존재"들 또한 다른 것들로부터 형성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들은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물론 내가 영향을 받고자 선택한 것들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들 또한 다른 영향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일부러"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알고자 "다양한 고전들과의 마주침"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알고자"하는 동기는 어떠한 경험의 영향일 것이다. 예컨대, 우연적으로 들뢰즈를 가르치는 수업을 듣게된 그러한 경험 말이다. 소급하면, 나의 모든 선택들은 "최초의 지점"에서는 "영향, 마주침, 우연"들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들뢰즈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방금 전 문장을 자박해야 한다. 의지에 따른 행위는 나에게서 최초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최초의 지점은 없거나, 적어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의 "출생"을 최초의 지점으로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벌써 다른 사람 혹은 존재들의 경험을 타고난다. 들뢰즈는 여기서 굳이 "나"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없다고 본다. 그 경험이 어떤 공간에 집약되어 나타냐느냐의 문제이지, 명확히 구분된 주체에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저 시작점도 보이지 않는 파도같은 경험들에 휩쓸려 그때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들만을 받아들이며,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앞에서 했던 말을 거꾸로 해보면, 내가 무엇을 원하게 되는지는 자발적이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발적이다. 가능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내가 원하는 것과 더욱 적극적으로 마주한다.

2. 그러면 보다 구체적인 선택지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3. 이와 함께, 우연적으로 새로운 경험, 그리고 새로운 욕구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4. 앞의 과정을 반복한다.

즉, 요지는 가능한 선택지를 넓히는 것이다. 선택지가 무엇이 될지를 미리 정할 수는 없지만, 선택지들을 더 늘려놓을 수는 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따라가면 된다. 이 과정 속에서, 기존의 욕구들을 구체화하고 충족해가는 와중에, 새로운 욕구들을 발견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즐기는 취미 생활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음식 취향을 조작하고,

나의 놀이 욕구를 조작하고,

나의 연애 취향을 조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나의 이러한 취향들은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변화의 여지가 있다.

많은 경험들과 마주함으로서 말이다.


다시 한번 그러나,

나는 어떻게 변화할 지는 모른다. 그저 마주하면서 미쳐 몰랐던 "새로운 나"의 취향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좋은 삶에 대한, 그리고 비자발성의 긍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는 이제까지 형성된 "나의 취향"에 달렸지만, 

"나의 선택의 범위"는 내가 확장할 수 있다.

요지는, "나도 미쳐 알지 못하는 나의 욕구를 개발하자" 정도가 되겠다.

사실 이러한 접근은 들뢰즈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유의 비자발성, 즉 마주침을 통해 들뢰즈 철학을 향한 새로운 욕구를 발견하고, 더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게 되는 "동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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