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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 Apr 06. 2020

<가버나움>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합니다

출생기록조차 없이 살아온 어쩌면 12살 소년 자인으로부터

영화 <가버나움>을 보는 내내 다른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주인공 소년 자인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자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삶이 안쓰러워 지켜보고 있는 나 자신이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영화가 종료된 후에도 한동안 마음이 묵직했다.

다행히도 앤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마지막 컷인 자인의 마지막 표정은 러닝타임 내내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행복한 미소로 마무리되었지만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과제를 껴안은 듯한 무거운 느낌은 여전했다.
'주인공은 어려운 시절을 딛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흔한 서사구조를 가진 여타의 작품들과 구조적인 맥락은 똑같으나 왜 이토록 답답한 느낌과 더불어 윤리적인 중압감이 들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자인의 눈빛과 말투다. 대개 열 살 전후의 소년 소녀의 눈빛을 떠올리면 순진하고 장난기가 어린 눈빛이 연상되나 자인은 어린 소년의 눈빛이라 하기에는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극 중 내내 내뱉는 말투도 거칠다. 화장한 여동생의 얼굴을 보고 “꼴 보기 싫으니 얼른 지워”라고 하기도 하고 “사는 게 개똥 같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하는 가게에서 좀도둑질도 거리낌 없이 하며 무료 음식을 받기 위해 거짓말도 뻔뻔하게 잘한다.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거침없이 전달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결국 극의 절정에서는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나를 낳은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결국, 자인의 세상에 대한 원망의 화살은 부모에게 향한다. 존재 자체에 대하여 화를 내며 따진다. 임신 소식을 알리는 엄마의 말에 “어머니의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르네요”하는 말하는 자인은 자신의 고통의 시발점을 출산으로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어난 동생을 지키지 못했으면서 또 다른 동생을 낳겠다는 부모에 대한 원망 섞인 절규이기도 하다. 무엇이 자인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자인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는 실제로 시리아 난민이며 길거리에서 우연히 감독에게 캐스팅되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관계로 즉석에서 지시를 내리며 연기를 하도록 했고 세부적인 대본 없이 자인이라면 그 상황에서 했을 법한 대사를 자연스럽게 하게끔 유도했다고 한다.

실제 자인의 삶이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홍보처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미디어 매체에 전달했고 필자도 이 사실을 영화 보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픽션이 아니고 주인공 자인의 실제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관객은 영화의 모습에 현실을 대입하여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고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가버나움>은 전 세계가 떠안고 있는 문제인 난민, 기아의 문제를 모두에게 나누어준다.

그렇게 스며든 영화를 본 우리는 문제의 근원을 찾게 되며 결국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버나움> 관객에게 당신 삶의 이면을 보여주며 문제의식을 촉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감독과 관계자들은 실제도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해 영화에 출연한 자인, 라힐, 요하스, 사하르, 트레저에게 금전적, 교육에 대한 지원을 꾸준히 지원해 주고 있으며 영화에 등장한 이들 외에도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관객들을 위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영화관 안에서 만의 일회성 소비가 아닌 본격적인 활동은 영화가 종료된 시점부터다. 영화는 시발점일 뿐이다.

영화가 끝난 후 자막으로 자인, 라힐, 요나스, 자하르, 트레저 의 현 행보에 관한 짤막한 글귀가 올라간다. 가버나움 재단의 도움을 받은 주인공 자인이 가족들과 노르웨이에 정착했다는 내용, 트레저와 사하르가 유엔 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영화의 배경인 베이루트 길을 벗어나 학교에 가게 되었다는 내용들이다.

여기서 드디어 안심하게 된다. 자인이 죽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며 칼을 들고 아사드에 뛰어갔을 때 느꼈던 다급함과 먹을 것을 찾아 요나스를 깡통 수레에 넣어 끌고 나갔을 때의 안타까움이 그동안의 고행을 지켜본 입장에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들의 고통스러운 행보에 비해서 받은 보상은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가.

영화의 선한 기획의도와 이후의 행보를 봤을 때 높은 평점을 받을 만 하나 영화 자체만 놓고 봤을 땐 완결성이 높은 편이 아니다. 자인의 활짝 웃는 모습은 그동안의 고통을 모두 해결하고 행복한 삶의 문을 활짝 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구조적 모순은 해결해내지 못한다.

남겨진 자인의 동생들과 열한 살에 팔려 가 임신 중에 고통스럽게 죽은 사하르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어찌 보면 찝찝함이 없는 개운한 완결을 바라는 것은 구조적인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 또는 이해하기 싫은 필자의 욕심일 수도 있겠다.

<가버나움>은 영화와 현실을 넘나들어 범인류적인 마인드로 세상을 안으려는 노력을 했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했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가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당면 과제의 영화화를 통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버나움>이 보여준 것이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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