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소설/ 창비
눈앞에서 엄마와 할머니가 괴한에 의해 칼에 찔린다. 할머니는 죽고 엄마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이 상황에서 멀쩡히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 윤재에게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윤재는 알렉시티미아라는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다. 아몬드처럼 생긴 뇌 편도체의 이상으로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병명을 알게 된 만 네 살 무렵부터 엄마는 ‘자동차가 가까이 오면 피한다.’, ‘사람이 다가오면 부딪히지 않도록 비켜선다’와 같은 일상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부터 ‘상대방이 웃으면 똑같이 미소를 짓는다’와 같은 감정표현하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가르친다.
가끔 숙지한 것과 현실 상황의 괴리감은 있었지만, 엄마와 할머니의 피나는 노력으로 윤재는 꽤 평범하게 자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나중에 사람들은 내게 왜 그랬느냐고, 왜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일 쉬운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p.214
난 이 책을 호기심 반 부러움 반으로 골라 들었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엄마에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걱정을 사서 하는 성격이라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떠오르는 걱정거리들이 많으면 그날을 유독 힘들어했는데 같은 상황을 맞닥뜨려도 이성적이고 냉철해 보이는 타인들이 부러운 마음에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윤재’라는 캐릭터에게 이끌렸고 궁금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우리는 감정의 성숙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고 감정을 통해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감정을 배우기도 하고 확장시켜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느끼는 이 감정을 이론적으로 배워야 한다면? 그리고 그 이유가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눈엣가시처럼 보이지 않기 위함이라면 어떨까.
윤재는 그 이후로 어설프지만 차근히 정의를 내려가며 감정을 배워간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무덤덤하게 행동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타인의 감정을 짐작해 보기도 하지만 할머니를 죽이고 엄마를 다치게 한 괴한의 감정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밖에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윤재는 그 속에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감정의 모순을 본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245.
괴한에게 습격당했을 때 보고만 있고 도와주지 않던 사람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을 보면서도 무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심 박사의 행동을 떠올리며 인간의 모순적인 행동에 의문을 가지고 윤재만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무덤덤하고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좋은 결말로 마무리됐지만 결론적으로 윤재는 사이코패스다. 이름만 들어도 위압감이 드는 병명이지만 책을 읽고 나니 윤재가 가깝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피해야 할 사람이 아닌 보듬어야 할 존재로 느껴진다.
청소년 문학이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좋은 책이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기발한 내용의 문학도 좋지만 <아몬드>같이 사람 본연의 모습을 꾸밈없고 가감 없이 보여주는 글이 좋다.
점점 감정을 느껴가는 윤재를 보며 생각한다. 분명 흔들리겠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다.
책속에서 끌어올린 좋은 문장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사람, 죽은 사람 구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 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 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