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el Mar 18. 2024

따뜻한 봄이 오면

파김치는 짜파게티랑 

 봄이다. 

 바람은 거칠고, 봄비가 여름 장마처럼 내리는 이상한 한 해가 시작되었다. 


 설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났음에도 어머니께 다녀올 틈이 나질 않았다. 주말마다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정초라 해인사에 올라갔다가도 전화받고 내려오는 일도 생기고, 미리 사무실에 나가 대기해야 할 상황도 생겼다. 년 초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만치 유난해서 올해가 삼잰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요새 같아서는 내 일생이 삼재를 갖고 태어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저런 일로 어머니를 보러 가는 일이 미뤄진 것인데, 내가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든지 말든지 매화는 벌써 꽃봉오리를 피워냈고, 바람은 부드러워졌다. 이젠 더는 미룰 수 없는 때가 되었다 싶어, 지난 주말 어머니 댁에 다녀왔다.  봄나들이 가자, 미리 연락을 드리고 뒷날 아침 어머니 집에 갔는데 외출 준비는 전혀 없고, 파김치를 담은 김치통이랑 냉동실에 얼려놨던 고깃덩어리가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이미 외출은 안 하시겠다고 맘을 먹고 계신 터였다. 아니~ 외출을 안 하실 맘이셨다면 이번 주 말고 꽃이 더 피고 따뜻해지면 가자고 미리 말씀하실 일이지 실컷 준비 다 하고 왔더니 이게 뭐냐고 구시렁대는 나를 보고는 뭐가 기분이 좋으신지 배시시 웃기까지 하셨다.

 


  올해로 89세가 되신 어머니는 더 이상 내게 반찬을 만들어 주지 않으신다. 지난해 한 삼 년 만에 김장을 하셨는데 그것도 친구분께서 농사지은 배추를 억지로 갖다 주셔서 어쩔 수 없이 김장을 하셨다고는 했다. 그렇다고 나를 주시려는 게 아니고 엉덩이뼈가 내려앉아 병원에 계시는 당신의 친구분을 위한 김장이었다. 노인들끼리는 서로의 음식이 입에 맞아 나누어 먹지만, 우리가 당신을 위한 반찬을 만들어 가고서부터는 당신보다 우리의 음식이 더 맛있다며 잘 나누지 않으신다. 대신 양념은 여전히 챙기신다. 

  그런 어머니께서 지난 설에 파김치를 담으셨는데 우리 형제들이 그걸 맛있게 먹는 걸 유심히 보셨나 보다. 내가 당신 집에 온다는 연락에 서둘러 보행 보조기를 밀고 시장에 나가셔서는 파를 한 단 사서 파김치를 담가 놓으시고는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한번 먹어보라고 뚜껑을 열고 권하셨다. 숙제 다 해 놓고 자랑하던 초등학교 때 내 딸의 미소가 저러했을까?

  맛있다. 파의 알싸한 아린 맛도 좋고, 고춧가루의 매운맛도 좋았다. 뒤따라오는 단맛도 강하지 않아 식은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서 그 위에 파김치를 올려 입이 터지게 한 입 먹는 나를 보시는 어머니의 미소는 두고두고 참 그립겠다 싶을 만큼 보기가 좋았다. 다시 숟가락을 떠는 내게 어머니는 고슬고슬 밥을 새로 지어, 내놓은 소고기 구워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결국엔 내 외출하자는 제안에 대한 어머니의 답은 처음부터 ‘NO’였고, 당신의 그림은 당신께서 담아 둔 파김치와 소고기를 구워 나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이었나 보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는 새로 밥을 고슬고슬 짓고, 누군가가 사다 둔 소고기를 구워 파김치에 돌돌 말아 점심을 거나하게 먹었다. 옆에 따라간 우리 강아지(봉구 씨)까지 소고기를 몇 점 얻어먹고는 배를 까뒤집고 낮잠을 자는 것으로 우리 어머니와 한나절을 보냈다.



  봄이 되면 땅을 뚫고 올라오는 모든 것들은 다 보약이라고 했든가? 새로 나는 나물들도 그러하겠지만 쪽파는 늘 봄이 최고다. 

  나는 어릴 때 봄을 싫어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 싶으면 몸살을 크게 앓았고, 요즘은 헤르페스 감염이라고 하던데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 몸살 끝에 입술에 물집이 잡혀 오랫동안 고생을 했었다. 매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내게 온 계절병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씨름하고 나면 4월이 되고, 4월의 따뜻함이 내게는 나른함으로 와서 더욱 지치게 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봄을 좋아할 수 있었겠는가? 참 입맛도 없고 힘들었던 시기에 어머니가 매번 밥상에 올려주시는 쪽파를 가득 썰어 넣은 양념장은 내 유일한 반찬이었다. 따뜻한 밥에 양념장을 한 숟가락 올려 비벼 먹으면 어느 순간 밥그릇이 텅 비어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오롯이 양념장에 흰쌀밥을 그렇게 먹었으니 어떻게 날씬할 수가 있었겠는가? 탄수화물 중독에 걸린 건 전부 우리 어머니의 파 양념장 탓이라 생각한다.  아~ 요즘은 헤르페스 감염은 그에 맞는 연고가 있어, 전조가 있다 싶으면 그 연고를 사서 바르면 별 고생 안 하고 하루 이틀 만에 가라앉는다. 

 요맘때 잔파는 쫑쫑 썰어 양념장을 만들면 기가 찬 맛있지만, 그에 버금갈 만치 파김치 또한 입맛 돌게 하는 음식 중에 하나다. 아이들이 짜장면을 끓여 파김치랑 먹으면 어마어마하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먹어보니 진짜 어마어마하게 맛있었다. 

    


 파김치를 담글 계획이면 일단 한 단으로는 안 된다. 두어 단을 사서 뿌리를 잘라내고 일일이 껍질을 까야한다. 2월 파는 자잘해 손질이 상그럽다. 손질만 끝내도 김치 담그는 일의 9할쯤 해 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파를 손질하기 전 찹쌀풀이나 밀가루 풀을 미리 쒀 식혀놓으면 부엌에 있는 시간을 절반쯤 줄일 수 있다. 파를 잘 씻어 물기를 빼놓고, 양념장을 만들어야 한다. 기본 베이스는 멸치액젓이고, 마늘은 많으면 안 되니 일반 김치를 담을 때의 절반만 준비하면 된다. 미리 식혀둔 찹쌀풀에 고춧가루, 마늘, 액젓을 넣어 골고루 풀면 파김치 재료 준비는 끝이다.  단 음식을 안 좋아하더라도 올리고당 한 숟가락을 넣으면 매운맛이 가라앉으면서 한 맛 더 난다. 중요한 건 파김치는 양념이 부족하면 맛이 없다. 좀 범벅이다 싶은 정도가 적당하다. 파를 머리 쪽을 한 움큼 잡고 양념을 골고루 묻고 통에 차곡차곡 쌓는 것으로 김치 담그기가 끝이 난다. 이때 한 끼 먹을 만큼을 잡아 살짝만 구분해 놔도 꺼내 먹기가 훨씬 수월하다.

 짜파게티를 한 봉지 끓여 파김치를 감아 한입 먹으면 몇 젓가락 잡지도 않았는데 바닥이 보인다. 그 맛을 봐야 하겠기에 집에 돌아와 짜파게티 두 개를 끓여 남편이랑 저녁을 먹었다. 물론 짜파게티에 돌돌 말아 한 입 가득 넣어 먹는 건 잊지 않았고, 김치통의 삼 분의 일을 다 비운 덕에 저녁 내내 물을 한 통은 마셨다. 내일 아침에는 얼굴 부기 빼느라 진땀깨나 빼지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에는 파김치가 왕이다. 


작가의 이전글 모두가 꽃이라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