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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 Jul 19. 2024

아버지와의 추억

내 아버지 이기경 씨 

나는 추억 팔이 글을 쓴다. 


글을 쓴다는 말이 좀 염치없긴 하지만 그래도 책을 두 권이나 내 이름을 달고 만들었으면 내 주변 사람들끼리나 따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 쳐 주기도 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 글의 대부분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팔아서 쓴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기함하게 했던 일들을 내 글의 소재로 갖다 쓰면서 나는 글을 제법 재미있게 쓰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 재미로 자꾸 아버지를 팔다 보니 아버지는 동시대를 산 사람 중에 가장 가부장적이고, 나쁜 남편이었고, 노년에는 염치까지 없는 노인네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 아버지가 대한민국 평균은 되었다고 쓰면 내 이야기에 혹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인가? 나를 위해서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금에도 평균 이상으로 이상한 남편이셔야 하고, 자식들에게 권위적인 그런 아버지 일 수밖에 없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이게 다 못 난 딸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또래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나는 나의 아버지와 추억이 많다. 

추억이 많으니 뽑아 먹을 글의 소재도 많다. 그것만으로 이미 내 아버지는 내게 참 좋은 아버지이다. 

다행이지 않은가.



우리 동네는 지리산이 빤히 올려다보이는 산골 마을이다. 산만 높고 계곡만 있었으면 그냥 산골일 테지만 우리 동네는 넓은 강까지 있어 오롯이 산골짜기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였다. 


그곳에서 유년을 보낸 나는 텁텁하게 더운 봄이면 들판을 덮은 시원한 보리 싹들 위로 뒹굴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 어려워했었고, 여름철 삼대가 울창하게 올라가면 그 삼밭에서 숨바꼭질하고 싶어 애를 태웠다. 

견디다 못해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삼밭을 신나게 뛰어다니고 나면 뒷날 동네 집집마다에서 애들을 잡았다. 대부분은 작당해서 같이 논 게 맞지만 간혹 억울한 매질도 없지는 않았다. 삼대가 꺾이면 더 이상 자라지를 않고 그걸 삼 굿에 넣어 쪄도 뭐 실이 잘 안 잡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런 동네였다. 애들은 애들끼리 어른들의 보살핌이라고는 아침, 점심, 저녁 챙겨 먹을 때만으로 충분했고, 배만 채워 던져놓으면 알아서 잘 놀고 귀신같이 집으로 찾아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그런 동네에서도 우리 집은 좀 달랐다. 

들일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할머니께서 우리의 입성을 챙기셨고, 인근 작은 소도시에서 쌀장사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재력이 우리 형제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런 뒷배를 가졌으니 우리 동네에서는 우리 형제들에게만 허락된 일들이 많았다. 다들 웃을 일이지만 그 시절 상급학교 진학을 부모님의 허락이 아니라 내 성적 때문에 걱정해야 하는 집은 우리 집을 비롯한 두세 집을 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공부를 못한다는 게 혼이 날 일이라는 것이 이상한 동네였으니 내가 얼마나 금수 저였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 때는 매년 봄. 가을이면 가정방문이란 것이 있었다. 

한 마을이나 두 마을쯤을 대상으로 방과 후에 선생님들께서 오셨고, 교통편이 좋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그 마을에서 대충 말깨나 하는 집에서 선생님의 저녁 식사를 준비했었다. 한 동네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고루 있었으니 내 담임만 오시는 게 아니라 학교 선생님 거의 전부가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다. 매년 가정방문 시즌이 다가오면 우리 집에서는 미리 선생님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그건 이미 언니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일로 막내 인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가정방문이 있는 날에는 우리 집은 그야말로 잔칫집이 되었다. 그날은 아버지께서도 일찍 집에 오셨다. 일주일에 두세 번 집에 오시던 아버지는 가정방문 며칠 전부터는 봉지 몇 개씩 들고 막차를 타고 집에 오시는 날이 많았고, 닭도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쯤의 기억이지 싶다. 언니들도 다 졸업하고 나만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으니 그때가 맞을 것이다. 선생님들께서 오시는 날 나는 그동안 내 누울 자리만 빼고 책이며, 공책이며, 몇 안 되는 옷가지까지 다 전시하던 방을 깨끗하게 치우고, 앉은뱅이책상까지 말끔하게 치우고는 그 위에 전과나 수련장을 펴놓고 공부하고 있는 척을 했다. 밖에서는 이미 음식 냄새가 가득했고, 선생님들께서 집에 들어서는 순간은 온갖 호들갑과 소란함이 집을 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부르시기 전에는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척을 하느라 방문을 열고 나오지 못했다. 엄마가 부르시기 전에 방문을 열고 나갔다가는 선생님들께서 돌아가신 후 엄마한테 눈 흘김과 함께 등짝을 몇 대는 맞아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터였다. 고작 열두 서살 먹은 여자아이의 발칙한 “척”이었다. 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작은 시골 학교라 대부분 선생님이 오셨고, 자녀들을 맡겨 놓은 학부모 처지에서 당신네 집에 청해 밥을 해 드리지는 못해도 동네까지 오셨다니 뭐라도 손에 들고 저녁상이 차려진 우리 집에 오셔서 동석하셨으니 얼마나 집이 떠들썩했겠는가? 

런 상황에서도 내가 감히 책상머리에 앉아서 수련장을 풀고 있었다니 이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친 사기 중에 최고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사기행각을 뻔히 알고 계실 담임 선생님도 굳이 내 방에 들어오셔서 공부하는 척하고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돌아가서 친구들 앞에서 칭찬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게 전날 우리 집의 닭을 잡아드신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맛있는 음식을 인근 도시에서 공수해 올 수 있는 아버지를 가진 아이가 나라서 너무 좋았고, 잘 차려진 밥상의 중앙자리를 차지하고 차려진 음식을 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든든했었다. 나중에 내가 자라서 대학에 가고, 유학을 한다고 해도 아버지는 저 든든한 모습으로 나를 지지할 것 같았다. 그런 특별한 날의 기억뿐이긴 했지만 젊은 우리 아버지는 내게 큰 백이었고, 든든한 기둥이었다.      


내가 사춘기에 들어서고 아버지도 더 이상 나의 바깥 활동에 돈 말고는 굳이 참여할 수 없게 되고부터는 나는 나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서로한테 성질만 내고 살았다. 이후 내가 직장인이 되고 아버지께서는 내 직장 내에서의 모든 생활을 지독히도 궁금해하셨다. 그러나 하루하루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고 있는 그야말로 사회초년생이 아버지한테 들려줄 직장 이야기가 얼마나 있었을까? 자꾸 캐묻는 아버지를 싫어했고, 아버지는 말을 않는 나에게 더 유난하게 서운해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직장생활이란 걸 해 보지 않으신 아버지께서 작은 소도시의 가장 큰 건물인 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딸의 삶이 얼마나 궁금하셨을까? 그게 뭐라고 하다못해 지나가다 시장님을 봤다는 말이라도 했다면 얼마나 신나 하셨을까? 그럼 뒷날 친구분들이랑 만나는 자리에서 시장이 시청에서 어슬렁거리고 다닌다고 하더라 하는 자랑이라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유년의 한 시기처럼 아버지는 딸의 삶에 들어오고 싶어 하셨는데 철이 없어 아버지의 맘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던 인정머리 없는 딸은 매정하게 아버지를 밀어냈다. 대신 요즘은 자주 엄마한테 직장 내 일들을 말씀드린다. 그것도 내가 제일 잘한 것만 말씀을 드리니 우리 엄마는 시청에서 당신 딸이 제일 똑똑한 줄 아신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낯부끄러울 일이 많지만, 그냥 그렇게 지낸다. 굳이 지질한 딸의 실체를 아신다고 해서 맘만 불편해질 일이고, 좀 허풍이 있다고 해서 뭘 어쩔 것인가? 사기죄로 잡아갈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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