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에 묻혀 생각 흘려보내기
호화로운 자취생활이다.
운 좋게(사실 공사 중인 아파트 뼈대가 생길 때부터 물 떠놓고 기도 올릴 정도로 간절했던) 청년 청약에 당첨되어 새 아파트 17층에 살게 되었다.
게다가 베란다를 통한 창문은 허허벌판의 조망을 갖고 있고, 남서향을 바라보고 있다.
창문을 열면 앞 건물 사람들의 표정까지 보였던 전 자취방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혼자 있는 집에서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걸 즐기는 나에게 최고의 집이 되었다. (혼자! 있는 경우만 그렇다!)
가을 끝무렵 11월, 오후 2시가 되면 햇빛이 집안 깊숙이 들어와 물들인다.
일광소독을 좋아하는 나는 의자나 실내 슬리퍼 등을 햇빛 쪽에 옮겨놓기도 한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건 거실 선탠(!)
바람은 차갑고 햇빛은 따듯할 때, 창문을 활짝 열고 햇빛이 직방으로 쏟아지는 곳에 요가 매트를 깐다.
그 위에 담요 하나와 함께 맨몸으로 눕거나 엎드린다.
혼자에다가 창문 앞에는 건물 하나 없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담요를 이불처럼 덮기도 한다.
서양 사람들은 해변에서도 잘만 하는 선탠인데 혼자 있는 집에서 부끄럽다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유교의 민족인가.
햇빛을 몸으로 잔뜩 받으며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이 지나간다.
주로 걱정이 대부분이지만 볕은 계속해서 나를 뜨겁게 맞아준다.
요즘 내 행복 중 하나. 거실 선탠!
오늘 햇빛 속에서 흘려보냈던 생각 중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 도덕 선생님의 말이었다.
도덕 선생님은 발표가 끝난 17살의 나를 조심스럽게 불러냈다.
"너는 10년 뒤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거야."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아무리 졸아도 큰소리 한번 내지 못했던 소심하고 조용했던 분이셨다.
10년이 지났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서 어떤 잠재성을 보았을까?
선생님이 지금의 나를 마주한다면, 실망할까? 그 말을 취소하고 싶어 질까?
사실은 선생님의 말이 옳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