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제시어-요즈음 나의 관심사
요즘 나의 관심사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시선은 늘 '밖'을 향해 있었다.
무엇을 더 배워야 할지, 어떤 성취를 이뤄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혹은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것이 인생의 정답이라 믿었고, 그 속도감을 즐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나는 스스로에게 전혀 다른 결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정말 사랑하며 살아왔을까.”
이 질문은 예고 없이 찾아온 갱년기라는 불청객과 함께 시작되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미세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며 나는 내가 쌓아온 단단한 성벽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생각보다 그 파도는 거셌고 집요했다. 어떤 날은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음이 바닥 없는 수렁으로 가라앉았고, 또 어떤 날은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사소한 말 한마디에 심장이 요동쳤다.
처음에는 그저 호르몬의 장난이려니, 시간이 지나면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지나가리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니 유난 떨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의 무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벼워지기는커녕 습기를 머금은 솜처럼 점점 더 무거워졌다.
결국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찾았고, 상담이라는 낯선 여정을 시작했다. 상담실의 차분한 공기 속에 앉아 나의 내면을 꺼내 놓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고통스럽고도 생경한 경험이었다.
내 목소리가 타인의 귀에 닿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내 마음을 이토록 정성 들여 들여다보고 이야기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상담을 이어가던 중 선생님은 나에게 아주 단순하지만 묵직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동안 자신을 어떻게 대해 오셨나요?”
그 순간, 마치 정전이 된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대답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주변에서도 나를 향해 늘 "참 열심히 산다”, "능력자다”라는 찬사를 보내주었기에 나는 내 삶의 방식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마치 거울처럼 내 삶의 이면을 비추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감독관이었다.
내 인생의 사전에는 '적당히'라는 단어가 없었다. 맡은 일은 완벽하게 끝내야 했고, 타인의 기대치보다 늘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직성이 풀렸다. 스스로 설정해 둔 높은 기준선은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옥죄는 올가미이기도 했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마음속에서는 날카로운 비난과 나를 채근하는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너 이것밖에 못 해?”, “더 노력하자.”, “할 수 있어. 다시 시작하자.”
나는 그것을 성실함이라 불렀고, 책임감이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포장했다.
사실 그 엄격함 덕분에 얻은 것들도 많았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굳이 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올랐고, 젊은 시절부터 많은 기회를 얻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은 넓어졌고, 그 모든 성취는 내가 나를 몰아붙인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때의 치열함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며, 그 시간들이 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음을 인정한다. 솔직히 말해 후회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뿌리를 키우기 위해 줄기와 잎사귀들이 얼마나 메말라가고 있었는지를.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계속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멈추게 해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 한마디는 내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격려와 칭찬보다는 채찍과 다그침에 익숙했던 나에게 '멈춤'은 곧 낙오를 의미했다.
하지만 갱년기라는 강제적인 쉼표 앞에서 나는 비로소 멈추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를 가장 깊게 위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토록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던 '가족'이었다. 무기력함에 빠져 하루 종일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날에도, 이유 없는 짜증을 내비치는 날에도 가족은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빨리 기운 차려”라는 말 대신, 그들은 그저 내 곁에 머물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산적인 성과를 내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들의 고요한 기다림을 통해 깨달았다.
어떤 글에서 읽은 “사람을 가장 깊이 위로하는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조용히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다”라는 문장이 이제야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기분이다. 완벽해야 된다는 나의 오랜 착각이 가족의 무조건적인 수용 앞에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물론 수십 년간 길들여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되지 않은 하루 끝에 자책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를 발견하면 곧바로 마음을 다독인다.
‘아, 내가 또 나를 몰아붙이고 있구나' 라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의 시작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새로운 관심사는 '마음의 건강'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듯, 마음의 건강을 위해 나에게 친절한 언어를 건네는 연습을 한다.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는 말처럼, 나는 매일 조금씩 서툴게나마 나를 용서하고 수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인생의 전반부가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빨리 달리기 위한 시간이었다면, 이제 맞이하는 인생의 후반부는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게 품어주는 시간이어야 함을 느낀다.
“인생의 후반부는 더 빨리 달리는 시간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다.”
이 문장을 나침반 삼아 나는 오늘도 천천히 걷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느려도 상관없다.
여기까지 성실하게 걸어온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다.
요즘 나의 목표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나를 조금 더 이해하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나는 이제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