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제도로 보는 그 나라 학생들의 영어 수준
핀란드의 서울대 영문학과 다니는 아내의 수능 영어풀이
내 아내는 헬싱키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인데, 그중에서도 영어를 전공하고 있다. 참 내가 봐도 영어를 잘한다. 이런 내 아내가 한국 영어 수능시험을 보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번 시험을 같이 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입시 교육을 받은 나와 핀란드 교육을 받은 아내의 대결이다.
먼저 읽기 즉 독해 실력을 보면 아내가 나보다 훨씬 낫다. 심지어 아내는 단어 수준도 나보다 높다. 아내가 공부하는 자료들을 옆에서 보면 보기도 싫을 정도이다. 영어로 된 것들을 척척 읽어내고 뭔가 자연스럽다. 마치 한국인이 중국어를 배울 때 나오는 자연스러움이랄까? 어찌 되었든 본인도 영어를 참 편안하게 생각한다. 읽는 속도도 나보다 빠르다.
이해력은 어떨까? 일단 핀란드에서 헬싱키대학을 다니기에 이해력도 좋은 편이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교해도 학문적인 감각은 뛰어난 것 같다. 그렇기에 한국 고등학생들의 사고력을 시험하는 문제들이 내 아내에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1월 16일 그렇게 우리는 2021년 수능 영어 시험을 같이 봤다.
시험을 보고 핀란드와 한국 수능 영어 시험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을 해봤다. 시험 자체가 그 나라의 영어 교육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핀란드 영어 시험은 총 4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국 영어 시험은 1시간 남짓으로 이루어져 있다.
듣기 영역
한국의 영어 듣기는 22분 핀란드의 영어 듣기는 1시간이다. 거의 3배 정도 차이가 난다. 사실 듣기에 관해서 실력을 평가하려면 22분은 짧은 시간이다. 핀란드 시험에는 한 대화를 듣고 3문제씩 푸는 부분도 있는 것을 보니 난이도는 더 높은 것 같다. 핀란드 학생들이 영어를 잘하기도 하지만, 듣기 영역의 난이도가 높다 보니 학생들도 그에 맞춰 대비가 되는 것이다.
읽기 영역
읽기 영역은 비슷한 수준인 것 같다. 이에 주어지는 시간도 한 시간 남짓으로 비슷하다. 아내가 시험 문제를 풀면서 비슷한 문제도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유사한 측면도 있지만, 문제는 변별력을 주기 위한 빈칸 채우기 문제들이었다. 아내가 한 말이 인상 깊었는데, "이건 영어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나은 탐정인지를 테스트하는 시험이다." 나도 시험을 보고 나서 누가 더 꼼꼼하고 치밀한지를 측정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핀란드의 시험은 더 실용적인 문제들이 많다. 즉 실생활에서 사용 가능한 것들을 배우는 것이다. 반면 한국 영어 시험에 나오는 영어를 한국 학생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항상 1등급을 받아오던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절대 아니다.
쓰기 영역
이 부분은 사실 문장 구성 능력을 측정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즉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느냐를 측정하는 것이다.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말하기도 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영어 수업시간에 말하기를 연습하거나 글쓰기를 하는 시간도 많다고 한다. 글쓰기 연습을 하면 반드시 동사들을 활용하는 것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Be 동사를 써야 하는지, 다른 일반동사들을 써야 하는지, to 부정사를 써야 하는지 동명사를 써야 하는지, 언제 어떤 시제로 어떤 인칭으로 써야 하는지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 영어시험에는 쓰기가 없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공부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문장 한번 말해보라거나 써 보라 그러면 쩔쩔매는 것이다. 시제는 어떻게 쓰는지, 인칭은 어떻게 구분하는지, 동사는 어떤 동사를 써야 하는지, to 부정사와 동명사는 왜, 언제, 어떻게 쓰는 것인지 전혀 모른다.
실제로 한국 고등학교 영어 시간을 살펴보면, 단어 위주, 읽고 해석하기 위주의 수업이 전부다. 말하기나 쓰기에 할당된 시간은 없다.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것을 굳이 학교에서 가르쳐서 학생들 성적이 안 나오면 괜히 학부모님들에게 욕을 먹는다. 그 나라 시험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방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영향력을 갖는다. 현 영어 입시제도하의 학생들은 더 치밀하고 꼼꼼하게 문제풀이를 하는 법을 학교에서 배우게 된다.
핀란드 학생들은 약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쓰기 시험을 친다고 한다. 전체 시험 시간의 거의 절반을 쓰기에 할당한 것이다. 채점을 위해서 위원회를 만든다고 한다. 위원들이 모든 학생들의 쓰기 시험을 일일이 다 채점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 시험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 핀란드 교육부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다 영어를 잘하시는 것 같다. 본인들이 영어를 성공적으로 학습했기 때문에 교육 정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충격적인 한국 영어의 실체
아내와 시험을 같이 보고, 둘 다 좀 놀랐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틀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우리처럼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어려운 시험인데 한국 학생들은 어떨까 하는 좌절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입시제도라는 것이 학생들 사이에서 우수한 학생을 뽑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일 학교에서 해석하고 문제 푸는 연습만 하는 전문가(?)들을 성적순으로 나누려면, 문제들은 원어민들이 봐도 어렵게 낼 수밖에 없다. 그것도 굉장히 애매한 보기를 섞어서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100점 받은 학생들이 넘칠 것이다.
슬픈 사실은 학생들이 문제는 가볍게 풀어내겠지만, 그 내용을 말해보거나 쓰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전혀 해본 적이 없기에 너무 부족한 것이다. 내가 지향하는 교육은 바로 우리 학생들이 턱없이 부족한 말하기 쓰기 영역이다. 문장 구성 능력이라고 내가 부르는 이 부분을 가르치는 것 만이 대한민국의 영어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