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혔다. 어쩐지 아까 수유할 때 느낌이 다르다 했는데 이제 어디쯤인지 그 위치도 알겠다. 정말한 달에 한번 꼴이구나. 모유수유가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누가 그랬나. 한 달에 한 번씩 오케타니를 가야 하는 이 불운한 가슴이여. 가정경제는 나 몰라라 하고 영세 자영업자 활로만 열어주고 있으니 경제활동마저 이타적이어서 뭐가 남겠나. 이래저래 딱한 사정인 건확실하니 격려 차원에서 누가 한 시간만 내 애를 좀 봐줬으면. 다른 거 다 제처 두고 바리바리 기저귀 보따리에 어린 너까지 둘러업고 집을 나설 생각에그저 막막하구나.
자고로 육아란 굽이굽이 예상치 못한 변수를 숨겨놓고는 심장을 들었다 놓는 담력훈련 내지는 눈물 쏙빠지는 화생방 훈련을 반복하는 스펙터클 어드벤처 개고생 다큐라는 걸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내 육아에 고비를 맞게 한 한 줄기 큰 획은 염증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염증이라 하니 가슴 철렁한 사건 사고가 아닌 잔잔한 에피소드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번뇌와 수고로움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볼 일은 아니라 말하고 싶다.
첫 번째 염증은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힌 유선염이다. 불리한 조건(유선이 가늘어 자주 막히는 나의 신체적 한계)에도 나름 고집부리며 완모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시작할 때는 불리한 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 이후엔 멈출 수 없는 승부욕이 작동했던 것 같다. 아마 그때 나란 엄마가 느낀 승부욕은 애달음과 간절함 사이 웃자란 모성애의 발로 같은 것이었으니 이 또한 어리숙한 인간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 아니겠는가. 난임의 긴 터널 속에서 여성만의 생물학적 특성이자 특권인 임신 앞에 쪼그라들었던 내 여성성은 마침내 허락된 그 선물 같은 특권을 받아 들자 엄마가 된 여성에게 필수가 아닌 그저 선택사항인 이것에 사활을 건 듯 분투했다. 아마 그 마음 어딘가에는 이로써 내가 완벽한 여성이자 엄마라는 걸 내보이고 싶은 열등감이존재했으리라. 다행히 그 열등감 해소의 기회가 유선염이란 고행으로 찾아왔으나알아채지 못했다. 시작부터 과잉된 감정만으로그저 의무이니 당연한 것이라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으니 해소되지 못한 열등감은 켜켜이 쌓여 꼼짝 못 할 의무로 굳어진채 1년이라는 긴 시간 스스로를 옭아매게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그 열등감과 의무감이라는 포승줄을 풀어준 게 생각지 못한 존재였고 그것으로깨달음은시작되었다. 차차 풀어내겠지만 결국 주도권은 내게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스승이 되는 것이고 부모 된 자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은 겸손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겸손을 물려줄 수만 있어도 부모 된 도리는 충분히 한 것이리라.
세상일이 다 그렇지만매번 닥치는 새로운 시험은 언제나 당혹스럽고한껏 위축되게 한다. 그럼에도임신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 느낀 이 낯선 좌절감과 막막함은 발생기전도 통각 수용체도 달라어떤 것으로도 설명불가능한 거센 통증이었다. 상실감과 패배감, 버림받음 그 어디쯤에서 영혼을 헤매게 했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길은 오로지 임신뿐이었으니 되돌이표를 그리며 한 달에 한 번씩 반복되는 희망고문은 그래서 더 가혹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을 썰렁한 차림으로 걷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슬픈데 외롭기까지 한 그 길을 마침내 빠져나왔을때 환희보다 안도감에 비장한다짐을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그러나 인간은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가. 새로운 고통 앞에 자신을 압도했던 과거의 고통은 저만치 물린 채 바로눈앞에닥친 현실이가장 크고아프게느껴지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오로지현재를 살 뿐인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저 뜬 구름에 불과하고현재만이 생생히모든 감각과 영혼을 지배한다. 하여 나는 또깨달았다. 한 인간이 태어나 겪는 가장 어려운일은 자식을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그것은 생애주기마다 각양각색의 고통을 준비해 두고 가는 길마다 숙제를 안겨주니, 부모의 처지라는 게 삼라만상 이치를 깨닫고자 수행길에 나선 구도자와 별반 다를 게없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우주와또 다른 우주를 동시에키워내야 하는 게 육아이고, 이 엄청난 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저절로 겸손해졌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신이 내게 임신이라는 축복을 건네지 않고망설였던것은 단단히 준비할시간을주고 싶어서가 아닐까생각하게됐다. 그리 생각하니 첫 아이치고 늦은 이때가 내게는 마침맞은 시기라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둘의 힘으로만 온전히 키워내려 애를 썼고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며 달려온 결과 어김없이 몸여기저기에탈이 났다. 이곳은 남편과 나의 연고지가 아니었고 그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아이 하나를 키우려면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그 말이 떠올라 내 추억이 깃든 곳에서 내 아이를 키우는 따뜻하고 환상적인 순간을 꿈꾸기도 했었다.
우리 구멍씨. 감기 때문에 쓴 마스크가 이제 보니 신의 한 수였네요. 머리는 뭐 그냥 웃자요. ^^
독박육아에 유일한 최소 동업자께서는 그동안 쓴 많은 연월차로 반차도 힘든 상황이었고 염증으로 번지기 전에 오케타니 방문은 시급한 문제였다. 가만히 있어도살갗까지아픈 그 몸살을 다시 앓는 것은 정말 두려웠다. 걱정을 안고 수유하는 나를 보던 남편이 집 앞 마트에 간다고 일어서며 간 김에베이비시터도 구해오마 했지만속 시끄러운데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구나 싶어 그러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무시해 버렸다. 아이를 쏘서에 태워두고 잔손 가는 뒤치다꺼리 하느라 종종거리고 돌아다니는데 현관문을 열어젖힌남편이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부리나케 뛰어 들어왔다.
베이비시터 구했어.
그 기세는 흡사 개선장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귀를 의심하다 못해 '저 구멍씨가 혹시 부산이나 당진에 전화를 한 건 아니겠지. 구멍은 커도 그렇게까지 모자라는 양반은 아닌데' 하는 의심이 먼저 올라왔다. 친정도 시댁도 아니고 다 저녁때 나가서 애 볼 사람을 어떻게 구해온다는 말인가. 그랬다. 나는 잠시 육아에 빠져 사느라 내 남자의 기질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남자는 구멍도 컸지만 넉살도 오지랖도 못지않게 좋고 넓었다.
아이를 데리고 자주 가는 동네 마트가 있었다. 유난히 지나가는 동네 아이들에게 하트 눈을 하고 말을 걸어주는 살 부드러운 직원이 있었다. 우리 부부와도 안면을 터 안부를 묻는 사이였고 꼬물대는 아이를 언제나 함박웃음으로 반겨주시는 서글서글한 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일터에서 손님에게 보이는 공적인 호의를 사적인 마음으로 넙죽 받아 들고는 애를 맡아 달라고 했으니 이걸 눈치 없는 넉살이라고 봐야 하나 기민한 상황대처능력이라고 봐야 하나 혼란스러워 칭찬이 안 나왔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받아온 전화번호를 들고 정말 많이 고민했다. 눈 딱 감고 폐를 끼쳐볼까 싶었지만 나 같은 소심좌가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남편의 무리한 부탁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심하게 아픈 게 아니니 마음 쓰지 마시라 문자를 드렸다. 주섬주섬 외출가방을 싸는데 전화가 왔다. 부담 느끼지 말고 언니네 집에 놀러 와서 미숫가루 한 잔 마시고 간다 생각하라며 고마운 마음을 재차 전하는 게 아닌가. 두 번이나 거절하는 건 못난 내 심보가 들통나는 것 같아 감사하게도 그 마음을 넙죽 받았다. 덕분에 아이도 맡기고 시나몬가루 뿌린 꿀맛 같은 미숫가루도 얻어먹고 새처럼 훨훨 날아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다행히 유선염 직전에서 살아나 뻥뻥 뚫린 내 유선은 원활히 모유를 공급했고 당분간은 무리 없이 포유류 어미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내게도 동네 지인이 생긴 것이다. 낯가림을 핑계로 활동반경이 좁았던 나를 대신해 영역확장이라는 수고를 해준 남편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덕분에 매 년 커가는 아이를 마주칠 때마다 응원과 덕담을 해주시는 마트 이모 두 분이 생겼으니(두 분이 직장 단짝이라서 사정 얘기를 전해 듣고는 번갈아 맡아주마 하셨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그의 넉살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더불어 두 부자는 마트에 떴다 하면 왕성한 경제활동으로 내수경기 회복에 앞장서고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훈훈한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래서 더 감사한 마음이다.
까까머리 시절. 순해 보이나 의지 표명만큼은 단호박이었던 상남자.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의 유선은 막혔다 뚫렸다를 반복했고 열두 달의 시간 동안 총 3번의 유선염을 앓으며 고비를 맞기도 했으나 그럭저럭 버티며 성공적 완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라는 이 대장정의 끝에는 더 큰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었고 덕분에 승부욕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대서사의 키맨은 내가 아니었다는 점. 시작은 나의 의지 내지는 고집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나 그 주도권은 내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모유 수유를 해본 엄마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상징인 이 가슴은 엄마가 되는 순간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어떤 사회이든 모성은 젠더를 넘어서는 그 무엇으로 태초부터 이어져온 생명 존중을기반한 좀 더 거룩한 영역이 아닌가. 그래서 모유 수유하는 여성의 모습은 그 거룩한 모성과 연결되어 아름다운 장면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 아름다운 수유의 과정을 직접 통과해 온 여성으로서 좀 더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은 분명 하나 적어도 내겐 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혼란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곳은 나의 신체임에도 내가 지배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었다. 불수의적으로 뛰고 있는 심장처럼 내 의지가 아닌 아이의 식욕중추와 연결된 듯 두세 시간마다 반응했고 혹시라도 아이의 잠이 길어지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단단하게 차올라 고통을 안겨주기는 신체기관으로 변모했다. 그러니 주도권을 쥔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아이인 것이다. 대충 짐작은 했으나 확실한 한방으로 정신이 번쩍 나게 한 계기는 단연코 단유였다. 그렇게 내 아들은 확실히 틀어쥔 주도권을 들이밀며 내게 도전해 왔다. 때가 온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운한 애미와 이별을 고하는 매몰찬 아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