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탱하는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
코드블루 환자의 CPR은 대개 30분 정도 시행한다. 그 이상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고 사망 선고를 하는 편이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은 있으나 그날 그 환자의 CPR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수술 중 위험한 고비를 넘긴 환자였고 회복실에서도 애를 태워 이목이 집중된 것도 있었지만 과장님 환자라는 이유도 한몫 거들었다. 집도의가 도착할 때까지 레지던트는 최선을 다해야 했고 그 여파로 쉽지 않은 밤이 될 거라 짐작은 했지만 길어진 시간만큼 파고는 거셌다. 탑 시니어는 CPR 환자 차팅에 집중해야 했고, 경험 많은 차지 한 명이 CPR 액팅을 보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발이 묶인 두 간호사의 환자까지 돌아가며 봐야 했으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해 1분을 쪼개 쓰는 심정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니 그 밤이 어떻게 돌아갔겠는가. 오더에 구멍 내지 않으려 정신줄을 붙들고 사력을 다했다. 네 환자 내 환자 나눠 집중적으로 각개전투하는 곳이 중환자실인데 그날 밤은 모두가 내 환자인 것처럼 서로 엄호하며 지켜내야 했다. 알아서 먼저 처리해 주고 놓치는 게 생길까 서로 묻고 확인하며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치 한쪽 날이 부러진 톱니바퀴가 헛돌지 않게 부러진 날에 한 사람씩 들어가 몸으로 버티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밤 새 뒤치다꺼리 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진 일개미 간호사들은 동이 틀 즈음엔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신경외과를 지나 외과계 출입구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동료들의 눈빛, 실루엣인데 대충 봐도 그날은 대재앙 수준이었으니 출근하던 데이는 뒤돌아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처참한 전쟁터로 변한 일터로 걸어 들어와 너나 할 것 없이 일찌감치 손을 보태 정리에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심란한 마음 묻어두고 출발선 한참 뒤로 걸어 나와 바통을 이어받아 묵묵히 이어 달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최상이었다. 돌아보면 참 고마운 일이나 언제라도 입장이 뒤바뀌는 변화무쌍한 현장에서 일하던 우리에게 그건 그냥 기본값 같은 것이었다. 굳이 더 갖춰야 할 덕목을 꼽자면 감정을 상수로 묶어 두는 굳건한 마음정도. 감정마저 변수가 되면 결코 일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일은 오직 일로만 대하고 퇴근과 동시에 빨리 잊어버리는 사람이 오래 버틸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일과 삶을 산뜻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것에 연연해 돌아선 사람에게는 여전히 그곳이 히말라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날 마스크를 벗어던지며 탈의실로 들어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었고 옷 갈아입기 바쁘게 3층을 탈출해 병원 밖으로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만 싶었다. 숙련된 경력자도 넌더리 치는 상황인데 영혼까지 털린 쌩신규는 오죽했을까. 모두가 출근을 서두르는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퇴근하던 내 앞에 붉은 악마 몇몇이 지나갔다. 월드컵 직관 보다 현실 직시가 시급했던 나에게는 그들의 여유를 부러워하는 것조차 사치 같았고 그래서인지 붉게 물든 그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비현실적일 수 없었다. 모두가 붉게 기억하는 2002년이 나에겐 온통 암울한 초록이었고 이 보색 대비의 잔상은 꽤 오래갔다.(그때의 유니폼은 수술복 같은 짙은 초록색이었고 그 초록이 다시 싱그러운 의미로 돌아오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저나 바통을 이어받은 현장은 무사했을까. 상황이 꽤 복잡해 질거라 예감은 했으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더 대단했다. 심란한 분위기는 데이를 넘어 이브닝 때까지 이어졌고 사건의 여파로 병원 분위기까지 어수선할 정도였다. 수술 중 마취 이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고 그걸로 마취과냐 외과냐 책임소재 공방이 오고 가고 보호자의 소송으로 간호사도 레지던트도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가장 큰 문제는 소중한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보호자의 반응이었다. 완강했던 보호자의 거부로 사망한 환자는 영안실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로 인해 데이번 간호사들은 망자를 옆에 두고 일을 해야 했다. 장장 8시간을 말이다. 그래봐야 대부분이 스무 살 중 후반의 어린 여인들이었다. 슬프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고 아깝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더 힘들었을 것이다. 체험 삶의 현장은 언제든 생의 마지막 현장으로 돌변했고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몰아붙여봐야 돌부처 같은 마음을 갖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나.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일하고 있어 웬만한 일에는 무뎌졌을 그녀들이라 해도 그런 상황이 쉬울 리 없었다. 또한 생이 다했어도 마땅히 받아야 하는 한 인간의 존엄마저 묵살된 이 참혹한 현장에 남은 거라고는 여기저기 상처받은 영혼들 뿐이었다. 생은 끝나기도 했고 계속되기도 했다. 그러니 피고 지는 생명을 마주할 때마다 요동치던 그 감정도 언젠가는 상수가 되어 굳건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내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말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그랬다면 로프 하나에 몸을 맡기고 히말라야 등반에 나서는 전문 산악인의 그 담대함이 내게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그날의 일개미 간호사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참혹했던 그 밤을 지켜낸 것은 결연했던 우리의 의지라 믿고 있었다. 끊어지기 직전의 마지막 방호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성실하고 정직했던 일개미들이 만들어낸 균형이었다고. 그때 다른 이들의 푸념을 듣다 혼잣말처럼 내뱉은 한 간호사의 말에 얕은 내 마음이 넘실넘실 울렁였다.
그날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그 밤 우리를 지켜준 건 우리의 팀워크가 아니라 환자들이라고. 아무 탈 없이 안정적인 컨디션으로 우리를 지켜준 거라고. 그래서 내내 미안하고 죄스럽다고.
그 후로 오랫동안 이 말이 내 안에 싱잉볼이 돼 울려 퍼졌다. 그리고 오늘로 인도해 이 글의 서막을 열게 했으니 이걸 또 어떻게 봐야 할까. 때로 삶은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라도 있는 양 삶의 한 부분이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날의 강렬했던 경험은 내게 상처로 남았지만 결국 약이 되어 나를 지키게 했다.
균형이란, 성실과 정직이 만나 이루는 겸손의 미학 어디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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