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동 사는 여자 2

아이 친구 엄마와의 관계 설정 시 유념할 것들에 대해서

by 달과 앤

옆 동 사는 여자 1


도착한 그녀의 집은 수수했지만 정갈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녀에게 그 집은 잠시 스쳐가는 곳으로 눈에 차지 않는 그저 그런 집이었다는 걸. 단지 운이 나빠 기간이 길어질 뿐 가당치 않은 곳이라는 속내를 애써 숨기고 사는 중이었다. 마음속에 품은 그 욕망을 누르며 안분지족 하는 체했으니 시끄러운 그 속을 달래자면 험담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남의 집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게 결례인 것 같아 두리번거리던 시선을 거두고 준비해 간 원두를 건네는데 초대한 다른 엄마가 도착했다. 쭈뼛거리며 들어서는 모습을 보니 이 초대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 비단 나만은 아닌 듯 해 마음이 놓였다. 참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참기름 바른 듯 매끄럽게 만드는 것은 역시 호스트인 그 여자였다. 자기는 이렇게 살고 있다며 대번에 자신의 상황을 오픈하고 소탈한 초긍정녀 이미지로 다가오니 어떤 사람이 꽁꽁 싸매고 경계할 수 있었겠나. 게다가 적지 않은 나이까지 먼저 공개해 버리니 속내가 보여도 모르는 척 당해주마 싶었다. 연장자가 갖는 여유인지 강압인지 모를 선공이었지만 초면이라는 착시는 일견 화통하고 격이 없는 사람의 배려인 것처럼 느끼게 해 순순히 따르게 하는 면도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관계든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져 영 불편했지만 괜히 잘못 뭉그적댔다가는 까다로운 사람이 될 게 뻔했으니 도리가 없었다. 그 결과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이름, 나이, 자녀수, 남편직업, 본인 직업 및 전직이 줄줄이 실토된 후였다. 커피 한 잔에 호구조사까지 일사천리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멍을 때리는데 나머지 한 엄마가 도착했다.


언니, 나왔어.


둘은 두세 달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피아노 레슨 선생님 소개로 만나 서로의 딸을 친구로 묶어주고 종종 만나던 사이였다. 엄마들이 흔히 하는 실수인 겹친구 관계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끼리 놀린다는 핑계로 모여 엄마들이 정신 놓고 노는 관계. 일타쌍피를 노렸으나 그 최후는 설상가상이 될 수도 있는 사이 말이다. 통통 튀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 엄마는 말이 많아서 그렇지 오지랖 넓고 정도 많은 투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주 타깃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 거 잘 퍼주고 정보도 많고 말도 많고 버라이어티 해서 떨어지는 떡고물이 많았고 그게 그 여자의 구미를 당겼던 것이다. 가장 많은 피해를 봤다는 건 가장 많은 정보를 오픈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이스 피싱도 아닌데 관계에서도 이게 적용된다. 상대와의 친밀도와 내 정보의 오픈 정도는 비례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약점이 되어 관계를 꼬이게도 하니 말이다. 어쨌든 그날 이후 나를 포함한 네 여자는 종종 차를 마셨고 캠핑에 물놀이에 계절마다 함께하며 아이도 관계도 키워갔다.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든 관계는 사이사이 구멍이 나고 있었지만 되도록 표 나지 않게 각자 한도껏 메꿔가며 고요 유지되는 듯 보였다. 각자 그녀의 행동에 갸우뚱하게 되는 지점이 하나 둘 쌓여가고 있었지만 내색하면 험담이 되니 서로 조심하며 내적거리만 두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알게 됐다. 한쪽만 하는 조심은 결국 사고로 이어진다는 걸.



행동반경이 넓던 그녀는 험담하는 게 흉인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말이라는 건 돌고 돌아 결국 제 주인을 찾아오는 법. 그녀에게 많은 걸 공개했던 사람은 결국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게 쓸모를 잘도 뽑아냈다. 그래서 나중에 돌이켜 보니 누구는 그녀의 전용 기사로, 누구는 중고 아동복 공급처로, 누구는 돌봄 선생으로 충실히 제 몫의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했지만 야무지지 못했으니 감당할 몫이기도 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가 본 것은 그녀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모습이었으니 진짜 그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는 그 지점이 화가 났다. 나는 최대한 진솔하게 대했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았다는 게 기만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나의 솔직함은 상대의 솔직함을 전제로 하지 않은 내 태도일 뿐이었다. 상대의 솔직함은 고마울 따름이지 강요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관계에 있어 상대를 향한 지나친 기대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니 상대의 마음이 언제나 내 맘 같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버리는게 좋다. 그 사람의 태도는 그 사람의 것이고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관계는 스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영원히 계속되는 관계는 없고 혈연관계도 여차하면 끊는 마당에 고작 몇 년짜리 관계로 그렇게 속 썩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염두할 것은 아이 때문에 엮인 관계는 이 때문에 파투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 엄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내 아이와 그 집 아이가 별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이 관계의 구심점인 것이다. 그 균형이 깨지면 금이 가게 되어 있다.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고 무엇보다 자식 일에 장사 없는 법. 지금 내 옆에서 간도 쓸개도 빼줄 듯하고 손발이 척척 맞아 남편보다 의지가 되고 의리 또한 어마어마한 그 엄마가 어느 순간 테이블 저 반대편에서 원망과 분노를 퍼부으며 내 마음에 비수를 꽂는 날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피 해 숨어 다니라는 소리는 아니다. 시절 인연에 과한 해석을 붙여 스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소리다. 아이 친구 엄마는 말 그대로 두 다리 건너 알게 된 동네 사람이다. 주인공인 아이들을 놔두고 조연인 엄마들이 전면에 나서면 그 관계는 얽히고설켜 파국이 되기 쉽다. 내 아이가 그 집 아이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길에서 마주친 나는 뭐라 불릴까. 이모는 무슨. 그냥 아줌마다. 동네 아줌마의 정체성은 보편성이다. 보편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누구에게라도 푸근한 아줌마가 되는 것이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이모가 되기 위해 감정 낭비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봉준호가 연출하고 김혜자가 완성한 비뚤어진 모정을 그렸던 영화 마더. 극단적인 모성을 그렸지만 그 엄마의 시작도 처음엔 우리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삶의 모퉁이마다 숨겨 놓은 얄궂은 운명은 저마다 다를 터. 남에 티끌을 보고 쉽게 손가락질하다가는 언제고 내게 돌아올 돌팔매를 견뎌야 하는 게 인생사 아니겠나.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그만큼 귀한 것이고 내 사랑이 끔찍이 대단한 것이라면 그 사람의 사랑 또한 나 못지않은 법. 달라 보인다고 틀린 것은 아니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줄 수 있는 게 부럽기야 하겠지만 샘을 내 돌을 던져서야 되겠는가. 그것도 자식을 키운다는 사람이 말이다. 자식을 키우면 겁이 많아진다. 혹여라도 나의 실수가 아이에게 해로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언행을 삼가고 개미라도 밟을까 조심해서 걷는 게 어미 된 사람의 마음인데 그 여자는 그게 없었다. 우리가 질겁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고고한 백조처럼 치장하고 유유히 연못을 헤엄쳐 다녔지만 연못을 함께 쓰는 다른 오리와 새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위아래 훑어보며 재고 따지며 계산하는 오만한 이기심은 끝내 감춰지지 않았다. 오만했던 그 여자와의 작별은 이사로 끝을 맺었다. 어느 날 홀연히 접근하더니 어느 날 홀연히 떠났다. 떠나가는 과정도 기괴했지만 가는 순간까지 자신의 새 전용 기사를 찾아내는 걸 보고 우리는 혀를 내둘렀다. 어디서든 자기 구미에 맞는 사람은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니 어디서든 잘만 살 사람이라는 건 아주 확실했다. 주변이 괴로울 뿐이지.


그 여자에게 뒤통수 맞은 값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스쳐야 할 인연은 스칠 수 있는 용기, 거절할 것은 거절하는 단호함,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관계 속에서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게 결국엔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 정도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게 가능해야 감정 낭비만 하다 끝날 수 있는 엄마들과의 관계에도 똘레랑스가 시작된다. 사람들 주변에는 각자의 개울이 흐르고 있고 그 개울은 좁을 수도 넓을 수도 있다. 각자의 개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관용이 시작된다. 함부로 저벅저벅 건너오는 것도 건너오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것도 어쩌면 강압일 수 있음을 유념한다면 그 관계가 무엇이든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러니 새 학기 새로운 엄마들과의 만남을 앞둔 님아, 그 강을 건너기 전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시라. 쌓여가는 서비스 쿠키를 맛보느라 우리의 티타임이 퇴색되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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