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배우와 《잠수복과 나비》

구순에 대상 받은 이순재 배우에게 감사와 경의를 보냅니다.

by 달과 앤

젊음이 빠져나간 몸으로 느리게 천천히 살 수밖에 없는 시기 노년기. 생명이 붙어있어 존재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임에도 노쇠한 신체에 갇혀 빠르고 기민하게 나아갈 수 없는 시기. 따라주지 않는 몸을 가지고 느리고 천천히 슬로 버전으로 살아내야 하는 이 시기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아니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고 받아들이길 원하는 걸까.


구순의 나이에 연기 대상을 받은 한 노배우의 수상 소감을 들으며 숙연해졌다. 처음에 든 감정은 걱정이었다. 언제나 청년같이 짱짱하게 곧은 자세로 쩌렁쩌렁했던 그가 처음으로 부축을 받아야 하는 노쇠한 노인임이 느껴져 마음이 철렁했다. 마치 내 조부모의 쇠락함을 보는 듯. 화면을 통해 자주 보게 되던 한 어른이 이제 점점 필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확인하니 덜컥 두려웠다. 죽음은 삶의 어느 순간에나 도사리고 있음에도 모른 체하며 영원을 살 것처럼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필멸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순의 몸에 갇혔으나 여전히 또렷한 영혼으로 두려움 없이 말을 이어가는 그를 보며 분투를 느꼈다. 그래서 저릿했다. 살아간다는 것이 저쯤은 되어야 부끄럽지 않은 것이겠구나. 필멸할 테지만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 쇠락하는 몸 안에 갇혀있는 그 영혼은 끝내 늙지 않을 수 있음에도 껍데기에 매몰되어 영혼까지 도매금으로 넘기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일방적이지만 볼 때마다 응원하게 되었던 한 사람의 분투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길 바라며 수상 소감을 듣는 내내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빌고 있었다.


유한함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간절함.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동력이라면 필멸이 그리 슬픈 것도 아쉬운 것도 아니리라. 영원 불변하다면 우리가 이리 애쓰며 살아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직 나는 든 자리에 머물고 있으니 지금의 소회는 여물지 못한 설 익은 땡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으로 서서히 난 자리를 실감할 날만 남았다. 굳어가는 몸, 의지대로 따라 주지 않는 쇠락한 신체에 갇혀 사는 시기. 그때의 소회는 무엇일까. 지금의 소회가 코웃음이 나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감싸줄 만 해지려나. 땡감이 우린 감이 되고, 한 겨울 주린 까치 배를 채워줄 다디단 홍시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문득 오래전 읽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가 떠올랐다. 움직일 수 없는 몸 안에 갇혀버린 한 영혼의 분투를 그린 책.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인 깜박이는 왼쪽 눈으로 완성한 이 책을 읽은 것은 찬란한 젊음이 내 몸을 가득 채웠던 시기였다. 뭘 안다고 그 책을 집어 든 것이며 다 읽고 덮으며 뭘 아는 체했던 걸까. 가지고 있을 땐 그것이 소중한 줄 절대 알 수 없는 법. 그때 내가 어설프게 아는 체한 것을 이제와 치기라 여길 수 있는 건 내 몸에서 빠져나간 젊음을 알아차린 덕분이겠지. 그러니 난 자리에서 깨달음도 시작도 가능하다. 십 년 후에는 이 마음 역시 애송이 타령에 불과하겠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 찾아온 마비된 육체에 갇힌 한 영혼의 분투와 서서히 노화되며 쇠락을 맞이하고 있는 한 노배우의 수상. 비교할 수 없는 두 사례를 비교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게 무엇이든 삶을 대하는 태도에 숙연해지기 때문이다. 입안 가득 흐르는 침조차 삼키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기보다 계속되는 삶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어차피 흘릴 침 캐시미어 조끼를 입고 흘리겠다는 엘르 편집장다운 장 도미니크 보비. 부축을 받을 정도로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또렷한 기억으로 방송국 창립일까지 정확히 기억해 내는 그의 총기. 더불어 예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인기와 젊음이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연기를 연기로 평가하지 않는 세태를 꼬집는 소신까지 조목조목 밝히는 꿋꿋한 노배우. 장 도미니크 보비는 한쪽 눈꺼풀로 완성한 그 책을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열흘 후 비로소 잠수복을 벗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올랐다. 구순의 몸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긴 거리를 오가며 어렵게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한 노배우. 마침내 거머쥔 그 트로피조차 들 수 없는 기력이지만 신세 많이 졌다며 고개를 조아리는 그를 보며 경건해졌다. 필멸함에도 불구하고 분투하는 인간은 아름답고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것임을.

느슨한 주말, 오늘은 꼭 두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감사함으로 감히 써냈다. 다음 주 발행할 글은 손도 못 대고 있으면서 무턱대고 이것부터 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감사함을 표하고 싶어서. 부디 건강을 회복하셔서 조금 더 오래 배우로 남아주셨으면 좋겠다.




*사진출처-kbs 개소리 홈페이지, 연합뉴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