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서는 것의 어려움.
처음엔 그냥 상담만 받아 보려던 것이었다. 동네 아파트 상가에 장을 보러 갔다 상가 엘리베이터 홀 게시판에 붙어 있는 발레수업 광고를 보게 된 게 시작이었다. 허리, 목과 어깨가 돌아가며 말썽을 일으켜 일주일에 한 번씩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몇 년 전. 물리치료를 해 주시던 선생님의 "발레를 해 보시면 좋을 거"라는 추천의 말을 들은 후로도 별생각 없이 2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날 상가 게시판의 월 8회 발레수업 광고가 갑자기 도저한 기억의 바다에서 그 추천의 말을 건져 올려 자연스럽게 발레학원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만들었다.
젊고 예쁜 발레 선생님 앞에서 맨 먼저 꺼낸 말은 "지금 시작해도 될까요?"라는 물으나마나 한 질문이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는데 "되고 말고요." 이런저런 상담 후 덜컥 충동적으로 한 달 수강료를 결재하고 그제야 정신을 차려 보니 '아무래도 내가 최고령 수강생이겠는데' 하는 좀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무르자니 우습고 일단 결재했으니 그냥 한 달 해보자. 음악에 맞춰 춤추는 거니 재미는 있겠지 하고.
첫 수업에 어떻게 입고 가야 하나 고민하다 요가할 때 입던 요가복을 챙겨 입고 새로 구입한 발레 슈즈를 챙겼다. 집 근처 스포츠 센터에서 2년 정도 요가를 배우며 철마다 꽤 샀는데 코로나로 단체 수업이 폐강된 후 3년 동안 옷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요가복. 초보티 팍팍 나는 요가복 차림으로 첫 수업을 마친 후 든 생각은 '이래 가지고 운동이 되는 건가.' 스트레칭을 20여분 한 후 바를 잡고 발을 앞, 옆으로 뒤로 뻗었다 닫았다 수십 번 하고 마무리 점프를 서너 번 하고 나니 한 시간이 지났다. 지루한 데다 땀도 안나 운동을 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러다 춤은 언제 추는 걸까.
그러다 수업이 거듭되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잡아주는 자세를 몇 분이라도 제대로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점점 구부러지는 몸을 똑바로 세우는 게, 발을 세우고 팔을 들고 서 있는 것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걸. 제한된 움직임을 바르게 하기 위해 유연함과 엄청난 코어의 힘이 함께 필요하다는 걸. 그러기 위해 발 끝, 손 끝, 정수리 끝까지 제대로 된 힘이 끊임없이 전달되도록 애쓰며 똑바로 정지된 자세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는 걸. 말 그대로 제대로 서는 게 기본인 걸, 그 게 참 어렵다는 걸 하나하나 몸으로 배워 나가는 중이다.
발레를 시작하고 2년이 지나도록 아직 똑바로 서는 걸 제대로 못해 매 수업마다 선생님이 "등을 더 펴세요!!" 자세를 잡아 주시곤 한다. 연습실 전면이 다 거울인 까닭에 가감 없는 내 모습을 피할 수 없이 마주한다. 거울에 적나라하게 비친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씁쓸하게 낯설다. 바로 옆에 함께 서 있는 한참 어린 수강생들의 싱그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내가 나이를 참 많이 먹었네" 한다. 이미 든 나이가 더 도드라진다. 수업 시간에 나보다 더 나이 든 수강생, 아니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이도 본 적이 없어 누구라도 또래가 들어와 주었으면 바라는데 아직이다. (요가 수업에서는 거의 막내였는데~ㅎㅎ) 나이는 상대적이다. 자주 거울 속 나의 전신을 마주하다 보니 거기 비친 내 모양에 익숙해지고 그런 나와 친해지고 세월이 내게 남긴 흔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드는 나이를 어쩌겠나. 억울해할 일도 아니라고. 이렇게 하루하루 딱딱해지고 구부정해지려는 몸과 마음을 매번 다시 유연하게 만든 후 다시 바로 세워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게 발레의 시간이어도 좋다.
며칠 전 발레복을 처음 주문했다. 레오타드, 타이즈, 랩스커트, 렉워머,... 어찌나 종류도 많고 가격은 천차만별인지. 거기는 또 새로운 세계다. 언제 관둘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아직은 발레복을 입는 게 쑥스러워 그랬는지, 둘 다였는지. 요가 때와 달리 2년이 지나도록 발레복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새해가 되자 "옷 따라 그걸 입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도 달라진다. 이제 쭈뼛거리지 말고 선뜻이 해 보자." 그런 마음의 소리가. 외양을 제대로 갖추면 몸의 자세도 그것에 맞춰 좀 갖춰지려나 하고. 내 머릿속 발레복을 입고 춤추는 나와 현실의 거울 속 관절 인형처럼 뚝딱거리는 나의 현저한 격차라니. 갑자기 발레복이 그 간격을 메꿔 줄 것 같지도, 10년이 지나도 그 격차가 크게 줄어들 것 같지도 않지만. 갈 길은 멀고 매일매일 똑바로 서는 일은 어려워 그 길 힘이 될 동지가 필요해.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친구지만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벗처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고개를 들고 등을 세우고 코어에 힘을 주고 손은 우아하게 다리와 발은 곧고 힘차게 펴고 같이 가보기로 하자. 그나저나 발레복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주문했다. 10년은 거뜬히 입겠다. 그때쯤이면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날아오르는 춤도 출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