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장거리를 극복하는 법
항해사를 한다고 하면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어요. 그건 바로 연애는 도대체 어떻게 하냐는 것이죠. 5개월의 항해에 2개월의 휴가. 1년 중에 육지에 있는 시간은 고작 3개월 남짓한 상황. 대체 항해사들이 어떻게 연애 전선을 뚫고 지나가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배에는 VHF (Very High Frequency)라는 통신 기기가 있어요. 초단파 주파수를 이용해서 약 60~120 km 근방의 주변 선박들과 교신하는 기기죠. 이건 마치 확성기와도 같아요. 한 명의 말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어요. 만약 제가 10번 채널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똑같이 10번 채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예요. 통신을 하기에 매우 유용한 기기죠. 서로 거리가 가깝고 똑같은 채널만 쓰고 있다면 말이에요.
평화롭게 인도양 한가운데를 항해하던 어느 날이었어요. 주변 100km 반경에 배라고는 서너 척밖에 보이지 않은 조용한 바다였죠. 평상시에는 외국인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VHF 기기에서 갑자기 한국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보아하니 주변에 한국 국적의 선박 두 척이 더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두 선박은 서로 같은 한국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배였어요. 한쪽은 여자 항해사, 다른 한쪽은 남자 항해사였죠.
이전까지 서로 모르는 사이로 보였던 그들은 망망대해에서 한국인 동료를 발견한 것에 큰 감명을 받은 듯했어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서로 있는 말 없는 말 꺼내가며 열심히 대화를 나눴죠. 그 대화를 계속 듣고 있자니 사적인 대화가 너무 노출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공개된 주파수로 대화를 주고 받는 그들 본인은 정작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아마 그들은 주변에 그들의 한국말을 알아듣는 한국 사람이 더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가던 그들은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번호를 물어봤어요. 그러고는 휴가가 맞으면 하선하고 식사를 같이 하자는 약속을 잡았죠. 바다 위에서 무전기를 통해 이어진 데이트 약속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나요? 그 이후로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서로 휴가기간이 닿아 만나게 되었을까요?
꼭 다른 선박에 있는 사람과 만나리라는 법은 없죠. 오히려 같은 배에 타고 있을수록 서로 만날 확률은 훨씬 높을 거예요. 같은 배에서 하루 24시간을 같이 생활하며 5~6개월의 장기간 항해를 하게 되면 서로 감정 교류가 그만큼 많아질 테니까요.
사실 이렇게 배에서 만나 연인으로 이어지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어요. 서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이해하기도 너무 쉽거든요. 게다가 배를 나갈 수도 없으니 서로 자의든 타의든 딱 붙어있을 수밖에 없어요. 하루종일 일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고 생활도 같이 하다니! 여기 말고 다른 곳이 천국일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좋은 일이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아요. 지금에서야 같은 배를 타고 있지만 휴가를 센 뒤 서로 다른 선박으로 배승될 확률이 매우 크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배승되는 선박이 달라지고 휴가 기간까지 엇갈리는 경우 심할 땐 1년에서 2년까지 서로 전혀 만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해요. 현실판 견우와 직녀가 되는 것이죠.
물론, 이럴 때 서로 직종이 같다는 점이 오히려 빛을 발하죠. 남들한테는 너무도 생소한 상황이지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친숙한 상황이니까요.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아 연락이 여의치 않아도, 입출항 업무에 치여 평소만큼 신경써주지 못해도 서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요. 휴가를 나왔을 때나 승선하러 갈 때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 또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비현실적인 장거리 연애를 견디게 해 주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이렇게 같은 직군끼리 만나는 경우가 매우 많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아요. 오히려 다른 직종의 사람들과 만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아요.
다만, 이때는 이전과는 정반대의 문제가 발생해요. 배를 타보기는커녕, 이렇게 집채만한 배를 일생에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면 항해사의 상황, 생활 패턴, 업무 루틴 등 모든 것들이 다 이해하기 어렵고 생소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부터가 매우 큰 과제가 될 수 있어요.
일단 인터넷부터가 매우 큰 난관이에요. 요즘에는 선상 인터넷 속도가 나름 빨라진 편이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바다 한가운데에서의 영상통화는 그렇게 원활하지 못한 편이에요. 영상통화만 그렇냐 하면 음성통화를 하는 것도 신호가 불안정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 2~3일 간 아예 통화가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해요. 신호가 안 닿아서 통화가 안 된다니, 해기사가 아니고서야 정말 공감하기 어려운 문제죠.
생활 패턴이 달라진다는 점도 난관 중 하나예요. 일단 위치가 실시간으로 바뀜에 따라 시간대 또한 달라진다는 문제가 있어요. 서로 쓰는 시간이 달라 매번 시차가 얼마인지를 고려해서 상대방의 시간을 계산해야 하죠. 이에 더해, 항해사라면 오후 당직과 새벽 당직을 매일 나눠서 서기 때문에 더더욱 통화할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이 있어요.
사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몇 개월 간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겠죠. 군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몇 달을 아예 보지 못한다니요!
그런데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연애와 결혼 생활을 잘 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어요. 수개월의 승선과 하선을 반복하는 항해사와 기관사는 신기하게 유독 특정 직업군의 사람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것은 바로 간호사와 선생님이에요. 특정 직군과의 사랑의 작대기가 유독 많이 성사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 때문인지 확실하지는 않아도 사람들이 나름대로 짐작하는 이유들이 있어요.
일단 간호사의 경우에는 항해사와 같이 당직제도로 돌아가는 구조이다보니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듯해요. 업무 패턴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감정 교류가 깊어지고 더 깊은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아요.
이와는 달리, 선생님의 경우에는 선원들처럼 업무 기간과 휴가 기간이 명확하게 나뉘어지는 방학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남자친구의 휴가가 여자친구의 방학과 기간이 맞게 된다면 그만큼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또 없을 테니까요. 실제로 여자친구의 방학과 휴가가 겹치는 동료들을 보면 그렇게 행복해 할 수가 없더라구요.
물론 수적으로 이런 경향이 있다는 것이지 선원들이 꼭 간호사나 선생님만 만난다는 뜻은 아니에요. 서로 이해만 한다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간호사나 선생님이라고 이런 해기사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있냐고 한다면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지도 몰라요. 직업이 아니라면 대체 이런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뭘까요?
제가 다년 간의 항해를 경험하며 느낀 바는 그렇습니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유독 장거리 연애라서 내성이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에게는 되려 장거리가 아닌 다른 종류의 난관이 되었더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거리든 뭐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그들만의 힘이 있는 것이죠.
장거리 연애를 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를 보면, 모두가 갖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다른 형태"의 연애로 치환할 줄 안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별해 있는 시간을 서로에 대해 더 돈독하게 생각하게 되는 기회로 받아들여요. 각자의 삶과 자기개발에 좀 더 집중해서 한층 더 성장하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에게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죠. 그리고 삶의 군데군데 주어진 통화시간에 조금은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해요. 꼭 만나지 않더라도 마치 만난 것처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데이트의 일부라고요.
실제로 어떤 분은 장거리 연애 도중 항해가 예상치 못하게 길어지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세상에 이렇게 갑자기 항해가 길어져서 서로 애틋해지는 경험을 몇 명이나 해봤겠어" 라고요. 정신승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만나기로 선택한 마당에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단 훨씬 행복해 보이고 건설적이게 느껴져요.
그들에게 있어 장거리로 인해 '만나지 못한다'라는 것은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가 '다른 형태로 바뀐 것'에 불과한 거예요.
이런 태도는 연애에서만 써먹기에는 너무 아까운 태도라는 생각이 들어요. 똑같은 태도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업무에 진척이 없어 힘들 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 어떤 상황에든 적용될 수 있으니까요. 앞에 닥친 무언가가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더 나아가 '불행'이 아닌 '다른 형태의 행복'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닥친 시련이나 스트레스를 다루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아요.
생각의 전환, 이보다 더 간단하고도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에게는 장거리 연애만큼 스트레스로 다가올 만한 것은 무엇이 있나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여러분만의 '다른 형태'는 무엇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