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도와준 건 맞을까..?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보셨나요? 초반부에서 관식이는 결국 애순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배에서 뛰어내려요. 청년 양관식을 연기한 박보검 배우님은 이후에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을 위해 실제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4일 간을 꼬박 촬영했다며 소회를 밝히기도 했는데요. 드라마 상에서 관식이가 빠진 시점의 거리는 육지에서 꽤나 멀어보입니다. 수영해서 오기에는 너무나 먼 것만 같죠? 그렇다면 관식이가 그 길고 긴 거리를 헤엄쳐 육지까지 온 것은 충분히 현실적인 걸까요, 아니면 그저 드라마적 허용일 뿐일까요?
" 뭐고! 용왕님이 발목을 잡나, 갑자기 맞바람이 부노!"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관식이가 그 거리를 수영해올 수 있었던 것이 마냥 비현실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관식이가 뛰어내리기 전, 도라지 호의 선장님이 맞바람이 분다며 불평을 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에요. 맞바람을 받는다는 뜻은 배에서 애순이가 있는 육지 방향으로 바람이 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관식이는 뒤에서 바람의 도움을 받아 수영을 했다고 볼 수 있죠. 그 자연의 도움 덕에 관식이의 불같은 러브 스토리는 비로소 현실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 얘기예요.
대체 바람 방향이 맞바람이라고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냐는 분이 계실텐데요, 생각보다는 의미가 있어요. 저의 다년 간의 항해사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저 드라마 상 파도의 크기와 머리카락이 날리는 정도를 고려하면, 얼추 당시의 풍속은 20 knot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이건 대략 시속 40 km 정도 되는 셈이죠.
바다의 흐름인 '해류'(current)는 이 바람의 영향을 크게 받아요. 그런데 시속 40 km 가까이 되는 바람이라면 그로 인해 생기는 해류는 간단히 추산해도 시속 1 km 는 될 거예요. 별 거 아닌 것 아니냐구요? 수영을 좀 잘 하는 사람의 수영 속도가 시속 2 km 정도예요. 시속 1 km 정도면, 아무리 잘 해도 본인 기량의 25%, 많으면 50% 넘게 해류의 방향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죠.
이렇게 무지막지한 세기의 해류이기에, 이것이 나와 가는 방향이 반대냐 아니냐에 따라 희비가 많이 엇갈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관식이는 꽤나 운이 좋았던 거죠. 만약 용왕님이 살아계시다면 관식이를 슬쩍 도와준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럼 용왕님이라고 인간을 마냥 도우기만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항해사들은 바람의 방향과 세기로 인해 단숨에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해요.
당장 어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면 불수록 어업을 위해 바다로 나가기가 두려워지기 마련이에요. <폭싹 속았수다>에 직접 나오지는 않았습니다만, 날씨가 안 좋아지는 경우 어부들의 수심은 날로 깊어져만 가요. 바람이 특히 세질 때는 어부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순간도 많아요. 대표적으로 태풍 '사라'가 우리나라를 덮쳤을 당시, 46척의 우리나라 어선들이 태풍을 만나 귀항에 실패하고 1200명의 어부가 전원 실종되었다는 실화도 있죠. 이처럼, 바람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양관식이나 소형선들이나 그 크기가 작기 때문에 영향을 크게 느끼는 것 아니냐구요? 크기가 커지면 상황은 달라질까요? 아니에요. 사실은 오히려 이런 소형 어선들보다 대형 상선들이 바람에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아요. 왜냐하면 바람이 받는 면적이 사람이나 소형선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크기 때문이에요. '풍압 면적'(windage)이라고도 불리는 이 면적은 그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바람의 영향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국제 물류의 젖줄, 수에즈 운하가 2021년 당시 에버 기븐 호에 의해 출입이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통제를 잃은 400m 길이의 컨테이너선이 운하에 좌초되어 길을 가로막은 것이죠. 당국에서 피해 배상액으로 1조 422억을 요청할 만큼 규모가 컸던 이 사고는 그 원인 중 하나로 바람의 영향이 있었다고 주장되고 있어요. 시속 74 km 정도의 강풍을 맞은 탓에 속수무책으로 배가 돌아간 것이죠. 풍압 면적이 크기로 유명한 컨테이너선이기 때문에 바람의 영향은 더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우리 컨테이너선은 모두 이 운명을 피할 수 없어요. 우리 항해사들은 이 사고 이후로 더더욱 기상 예보를 예의주시하며 바람에 의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런 바람의 기세가 바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곳이 있어요. 그곳은 바로 하늘이죠! 12 km 상공에는 시속 60~100 km 에 달하는 제트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빠르게 흐르고 있다고 해요. 실제로 이 때문에 서울에서 로스 앤젤레스로 향하는 비행기는 돌아오는 비행기보다 2시간이 더 빠르다고 하죠. 조종사 분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는 경우 의도적으로 제트 기류를 타고, 서쪽으로 가는 경우 제트 기류를 피한 최단 항로를 취함으로써 이 사실을 십분 활용하고 있어요.
이처럼, 항해사들도 사전에 쌓아온 많은 지식들을 활용해서 바람의 영향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람의 영향을 받아 옆으로 밀리는 배의 방향을 역이용하는 것을 들 수 있어요. 직진을 하려고 할 때 옆바람을 받게 되면 배가 그대로 직진을 하려 하지 않고 대각선 방향으로 전진해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앞으로 똑바로 이동하지 못하는 것이죠. 항해사들은 이럴 때 이 밀리는 정도를 역산해서 의도적으로 밀리는 쪽의 반대 방향으로 똑같은 만큼을 비스듬히 전진해요. 그렇게 매번 바람의 영향을 직접 계산함으로써 원하는 목적지를 향할 수 있도록 선수를 조절하는 거예요.
좀 어떤가요? 제트 기류를 활용하여 우리에게 최단시간의 여객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조종사나, 풍압의 영향을 역으로 활용하여 배의 방향을 조절하는 항해사나 모두 적응에 성공한 '영리한 관식이' 같지 않나요?
이런 바람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불지요. 그것이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될 때도 있고, 우리를 가로막는 칼바람이 될 때도 있지만요. 그 칼바람이 저희한테 둘도 없는 추진력을 실어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그리고 그것은 때로 의도된 것이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기도 해요.
뭐, 산들산들 귀를 간지럽히듯 불면 그것대로 좋아요. 엄청나게 거센 고추바람이 불어서 제 등을 거침없이 밀어주면야 그건 훨씬 좋겠죠. 그렇다면 그 바람이 절 가로막는 칼바람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음, 방법은 얼추 세 가지인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철저히 예측해서 칼바람이 부는 곳을 진작에 피하는 것, 두 번째는 칼바람을 맞는 것 자체도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견디는 것, 마지막은 혹시나 내가 길을 잘못 반대로 가서 신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관식이는 자신에게 순바람이 불었든, 맞바람이 불었든 아랑곳하지 않고 애순이를 향해 거침없이 헤엄쳤겠죠? 관식이는 관식이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임이 분명해요. 하지만, 만약 관식이가 애초부터 단단히 마음먹고 배를 타기를 끝까지 거부했다면 어떨까요? 반대로, 헤엄쳐오지 않고 그 길로 부산을 향했었다면 어떨까요?
만약 거부한 쪽이 사실이었다면 애초에 떨어질 일도 없었으니까 잘 살았을 것이고, 되려 부산에 가서 운동을 계속 했다면 금의환향해서 더 멋있어진 모습으로 애순이를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다 그냥 상상의 나래일 뿐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예요. 오해는 마세요. 그럼, 여러분은 맞바람을 예측하는 관식이, 맞바람에 맞서는 관식이, 아니면 맞바람에 순응하는 관식이 중에 어떤 관식이로 살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에게 가장 영리한 관식이는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