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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Apr 03. 2024

류준열의 실제 인성..?

 지중해를 잠깐 들러 스페인의 알헤시라스라는 항구를 잠시 들러 나오는 길에 뉴스를 보니 한 주제로 한창 시끌벅적한 것 같았다. 바로 배우 류준열과 한소희의 결별 소식인데, 얼마 전부터 인스타그램으로 여러 설전이 오간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시간 안에 서로 이별할 줄은 몰랐다. 드라마나 배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이렇게 사사건건 업데이트 될 정도면 아마 지금 우리나라는 출근길이나 점심시간 같은 일상적인 대화의 장에서 한창 핫한 이야깃거리가 아닐까 싶다.


 이 글의 제목은 대놓고 소위 ‘어그로성’의 소지가 가득한데, 요즘 인터넷 사이트나 SNS 등을 보면 이런 제목의 콘텐츠가 우후죽순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주제를 네티즌들에게 가십거리로 던져주는 것은 흔히들 고속도로의 사설 렉카가 사고 난 차량들을 포획하는 것으로 비유되곤 하는데 이번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시가 아닐까 싶다.



 그놈이 문제네, 아무튼 간에.


 이런 콘텐츠들은 그 성격상 타깃이 될 만한 대상을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정말 누워서 떡 먹기보다도 훨씬 쉽다. 왜냐하면 사람 간의 사건사고는 어떤 경우에든 그래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양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나 상속논쟁처럼 거창한 쪽으로 갈 필요도 없이 길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기만 해도 서로 누가 잘못했냐며 시비가 붙으니 말이다.


 내 주변에만 봐도, 둘이 헤어진 것은 그렇다 치고 그래서 누가 제일 잘못했으며 누가 제일 불쌍한지에 대한 의견이 오가며 각자의 생각이 천차만별이다. 가령 “가만히 방치한 류준열이 쓰레기다”, “아무튼 환승 연애가 맞는 것 같다”, “처음부터 시비를 건 혜리가 잘못이다”, “시비는 시비고 그걸 물고 늘어진 한소희가 잘못이다” 같이 각자가 각자의 입장대로 사건을 해석한 후에 이제부터 누가 나오는 드라마를 안 볼 것인지 정한다.


 이제 그중에서 류준열 씨의 잘못이라고 여기는 일부 사람들이 ‘류준열의 실제 인성..?’이라는 표제를 건 콘텐츠에 들어가 수없이 댓글을 남긴다. 뭔가 문제가 보이는 듯한 과거 영상의 일부를 지적하며, 당시 류준열 씨의 나쁜 인성이 짐작될 만한 목격담들을 고백한다. 그럴 줄 알았다며 이미 싹수가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방금 보고 왔던 그 짤막한 영상의 댓글에도 이미 그런 출처 모를 목격담들에 ‘좋아요’가 수 만 개가 찍혀있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개인적으로, 그 댓글창에 찍힌 좋아요 수 만 개를 보고 매우 놀라웠고, 아직까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류준열 씨를 옹호해서는 아니다. 애초에 난 응답하라 시리즈조차 본 적이 없고 류준열 씨가 나온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그에 대해 아는 것도, 특별한 감정도 없다. 그리고 뉴스에 나온 기사들을 대충 몇 번 본 것 가지고는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기에 그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가릴 수도 없고 그럴 자격조차 없다.


내가 놀랐고 또 이해를 하지 못했던 지점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류준열 씨에 대한 단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었는지였다. 그 비난성 댓글을 쓴 사람을 포함하여 좋아요를 누른 수 만 명의 사람들은 이미 류준열 씨에 대한 평가를 모두 마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미 그 사람들은 이제부터 절대 그가 나온 어떠한 작품도 찾아보기는커녕 의도적으로 기피할 것이며, 그가 재활용하지 못할 쓰레기라는 판단까지 끝마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류준열 씨나 한소희 씨와 아는 사이일 수는 없다. 그 둘 중 어느 누구도 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건의 전말을 일거수일투족 설명한 적이 없을 것이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손에 꼽는 최측근들 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누구의 잘못이라며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일까?



 부실한 판결문


 사람 간의 시비를 제삼자가 공식적으로 따져주는 민사재판에서, 판사는 판결을 내리기 이전에 엄청난 양의 문서를 탐독한다. 서로 싸우는 양자는 모두 그 재판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생판 모르던 사람들이니, 자신이 거기서 잘잘못을 가리려면 얼마나 많은 뒷배경을 밑바닥부터 파헤쳐야만 하겠는가?


 심지어 이런 지독한 과정을 거쳐서 힘들게 판결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한쪽이 인정하지 못하고 상소한다. 그리고 그 단계가 올라갈수록 판사들은 그 사안에 대해 훨씬 더 면밀하게 분석해봐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직접 그들에게 누구의 잘못이라며 손을 들어줄 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는 나름의 판사들이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취합한 내용들을 해석하여 비공식적으로나마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이처럼 위에서 두 배우의 결별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린 수 만 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판결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판결문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매우 높은 확률로 그 근거가 매우 부실할 수밖에 없다. 법원의 판사들은 그 판결을 내림으로써 월급이라도 받지 우리 안의 판사들은 대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일도 아닌 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근거를 따지고 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타락시아


 그렇다면 우리 보고 어떻게 판단하라는 말이냐, 판단하지 말라는 말 아니냐 싶을 텐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딱 정확히 그것이다. 난 심지어 한소희 씨조차 류준열 씨를 판단함에 있어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로 맞지 않는 사이임은 분명하므로 헤어지는 것은 잘한 것 같지만 말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20년 이상은 서로 모르는 채로 지냈을 것이며 서로에 대해 아직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새발의 피보다 못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한 사건만 가지고 상대방의 전체를 보는 것은 너무도 섣부른 판단이다.


 심지어 당사자들조차 이럴진대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어쩌겠는가? 난 나도 당연히 그렇듯 우리 모두가 그 셋 중 어느 누구도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대체 그 상황에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본인 말고는 아무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앞의 글 중에서 언급한 적이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아타락시아’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론이 제창한 용어로써, 아타락시아는 ‘유일하게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이자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믿음도 판단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모두 근거를 갖고 판단을 내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때론 이 판단이 너무 늦어서도 안 된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 또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매우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사람에 있어서만큼은 그 판단을 유보하면 유보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버스에서 막 내린 승객이 막 출발하려던 버스 바퀴 앞에 머리를 들이민 채로 도로에 누웠다가 이를 버스 기사가 다행히 발견하여 그를 제지한 장면이었다. 이를 보던 패널에서는 미친 것 아니냐며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욕을 했지만, 그가 사실은 자폐증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는 것이 밝혀지자 모두가 이해한 듯이 숙연해지며 그를 동정했다.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그 어떤 상황도 사실 막상 그 내막을 들어보면 상대방이 이해가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더욱 아직 확실하지 않은 채로 어떤 사람을 비방하거나 욕되게 하는 것은 나중에 스스로 돌이켜 봤을 때 매우 부끄러운 기억이 될 수도 있다.



 모두가 행복하고 이해하는 사회


  나도 아타락시아를 항상 가슴에 새겨두고 살아가려는 편이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두는 예외가 있다면 바로 그 판단이 긍정적인 평가일 때다. 칭찬에는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 사람이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라거나 참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그 근거가 좀 미약하더라도 해주면 나에게나 상대방에게나 좋다. 그리고 심지어 그걸 듣는 제삼자도 괜스레 기분이 좋다.


 이런 면에서 보면 류준열 씨가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애써 그를 공격하는 언사를 행했을 때 무엇보다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류준열 씨도 주변 사람들도 아닌 그 말을 하는 본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부정적인 말과 감정들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식물조차 안 좋은 말만 계속 들으면 자연히 시들고 썩는다고 하는데 감정의 결정체인 사람은 오죽할까? 심지어 그 말을 하는 사람 옆에서 그걸 듣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좋은 일만으로 채워도 모자랄 혼자만의 시간에 내 입과 손에서까지 그런 말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찔하다.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적은 정보로도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당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나만의 사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멋대로 재단하고 험담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때 가서 아무리 억울해해 봐야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으니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이다.


 난 정 좋아요를 누를 것이라면 그래도 차이를 인정하고 헤어짐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한소희 씨를 인정해 주는 말에, 그래도 무엇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며 류준열 씨를 옹호해 주는 말에, 먼저 시작을 하긴 했지만 본인도 얼마나 스트레스였겠냐며 혜리 씨를 위로해 주는 말에 눌러줬으면 좋겠다.


 그런 좋아요 하나야말로 사랑으로 가득한 사회를 만드는 시작이자, 하루종일 고생한 나에 대한 선물이 아닐까?




사진 출처 : CL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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