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항해사 어름 Oct 02. 2023

우리가 몰랐던 치명적인 세 가지 마약

세상을 보는 효과적인 시선

 절벽 끝. 한 사람이 서 있다. 양팔을 활짝 펴고.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낭떠러지.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다. 하지만 그는 믿는다. 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면 실제로 날게 될 거라고. 쿵- 쾅- 쿵- 쾅- 심장이 요동친다. 그가 믿는 그 하나의 신념. 그것을 믿고 그는 절벽을 디딤돌 삼아 뛰어오른다. 그렇게 그는 사정없이 떨어진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 사람이 아무리 팔을 흔들어봐도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을까? 적어도 하늘을 날려면 윙슈트를 입든 로켓슈트를 달든 조치를 취하거나 그게 싫다면 비행기를 타는 것도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절벽을 맨몸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우리도 가끔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념과 현실


 이 사람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사람도 맨몸으로 하늘을 날 수 있다"라는 신념이다. 물론 그 신념이 반드시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뛰어내리자마자 갑자기 허리케인 같은 강력한 난기류가 형성되면서 일시적으로 몸이 붕 뜰 수도 있다. 그러다가 신이 도운 건지 그렇게 기류를 타고 고공을 활주 하다가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당신과 나 모두가 알다시피 제로에 가깝다. 굳이 말하자면 그 확률은 0.000001%. 그럼에도 그런 가능성을 믿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면, 그 사람은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고 말 것이다.



 기저율의 무시


 이 사람은 아주 낮은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자신만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령 확률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의 문제지 이렇게 깊은 신념을 갖고 평상시 열심히 운동하여 팔 근육을 키운 사람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믿었다. 그렇게 이 사람은 실제로 벌어질 확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자신만은 그 극악무도한 확률을 제치고 말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일컬어 '기저율의 무시(Neglect of base rate)'라고 부른다.

 

 '기저율'이란 전체 개소 중에서 특정 요소를 갖고 있는 개소기본 비율을 말한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한 학급에서 전체 10명 중 여자아이가 6명이라 하면, 기저율은 60%가 된다. 어떤 나라의 청년 10,000명 중 유동 자산 50억 이상의 자산가가 된 경우가 1명이라고 하면, 기저율은 0.01%가 된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였을 때, 유동 자산 50억 이상의 자산가가 될 확률은 0.01%가 된다는 의미다.


 신은 10,000명 중 9,999명에 해당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중에는 당신만큼 노력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당신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바늘구멍과도 같은 문을 뚫고 성공한 그 한 명의 자산가는 평상시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다가 개꿈을 꿔서 당일 집 앞 슈퍼에서 로또를 한 장 사온 백수일지도 모른다.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그저 로또 1등에 당첨될 운까지는 없었던 자기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당신이 부자가 될 확률은 여전히 0.01%다. 당신의 노력이 보란듯이 당신을 배신하고는 당신을 목표로부터 무참하게 내던질 확률이 99.99%란 의미다.



 생존자 편향


 이렇게 부자가 되는 길이 낮은 확률임이 명백함에도 당신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중견 기업 사장이 된 신화 같은 사람을 세바시 강연에서 본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다섯 번의 실패를 했고 한 번은 집 곳곳에 차압 딱지가 붙을 정도로 심각하게 열악한 상황이었으나 이를 딛고 일어서 100억의 자산을 일궈낸 장사의 신과 같은 인물이다. 게다가 유튜브나 책에서 사업이나 투자에 성공해 큰 부를 이룬 사람들을 보니 자연스레 더욱더 큰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한 가지 크게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 또한 10,000명 중에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돈을 불리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 자기 생각보다는 많을 것이라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만큼 많은 줄은 몰랐을 것이다. '실패'한 9,999명의 사람들은 세바시에서 강연하지 않는다. 유튜브를 하거나 책을 쓰지도 않는다. 그들은 쓰디쓴 경험을 뒤로 한채 자신의 사업에 변화를 주려고 하거나 목표를 버리고 다른 길로 뛰어들어 각자의 삶을 살기 바쁘다. 그러니 그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 언론이나 매체에 노출된 성공한 케이스만을 보며 마치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S급 영화배우나 억만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현상을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매우 높은 확률로 차은우처럼 탑급 연예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매우 압도적인 확률로 빌 게이츠 같은 역대급 부호가 될 수도 없다.



 결과 편향


 그런 내게 당신은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 당신은 하나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세바시에 나온 그분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많은 것'을 사업 아이템으로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철저한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욕구를 파악한다면 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생산했을 때 사업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요. 저는 이 조언을 철저하게 지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사업에서 성공해서 부를 축적할 확률은 매우 높아지겠지요. 그러니 그렇게 기계적으로 산술적인 확률로 제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분명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분석해서 그대로 행하는 것은 다른 허수들을 제치고 자신이 성공할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어찌 보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나머지 9,999명 중 3,000명 정도는 이미 그 사람의 조언대로 실천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과연 그 조언이 성공 확률을 드라마틱하게 높여주는 요인이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설령 확률이 높아졌다고 한들, 그것 자체가 성공을 확실히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나 실패한 사람들도 한 바가지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 사람의 경험담은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 어떤 것이 직접적인 요인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매우 어렵다. 실제로, 많은 대기업 총수의 경우 자신을 전담하는 용한 명리학자를 달고 다니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을 참고한다고 한다. 명리학을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 결과적으로 주가를 치솟게 하고 기업가치를 폭발적으로 올렸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명리학을 생각보다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결정이 성공적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실패했다면 당신은 십중팔구 '거봐라, 이상한 미신을 믿으니까 그런 사달이 나지' 하며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이렇게, 단지 좋은 결과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그 과정의 요인들까지 좋게 평가하는 현상을 '결과 편향(outcome bias)'부른다.



 인류의 근원, '믿음'


 당신이 이 시점에서 뭔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고 석연찮다면 이 글을 매우 잘 따라온 것이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뜻이다. 지금 당장 나조차도 앞 내용을 읽어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리고 추측건대, 아마 그 이유는 '내가 안 될 것이라고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매우 당연하기 그지없다. 세상에 어느 누가 "넌 어차피 높은 확률로 안 될 거야"라며 악담을 내뱉는데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불편해하는 이유를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한테는 '믿음'이 있다. 내일 고백하면 상대방이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 올해 시험에는 합격할 것이라는 믿음, 언젠가는 부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 우리의 앞날이 창창할 것이라는 믿음,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여태까지 우리가 살아온 힘의 근원은 모두 그 막연한 믿음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대다수의 믿음은 맹목적이다. 세상에 '내가 평생 동안 행복할 것이다'라는 믿음에 대해 오목조목 객관적인 근거를 대며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이 믿음들의 맹목성 덕분에 우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해 왔다. 자동차와 고층 빌딩, 스마트폰과 인공위성은 그것을 해낼 수 있으리라 감히 짐작하지도 못했던 시절에 근거도 없는 믿음으로 '깝죽거린' 미치광이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기에 인류는 '건방지게도' 화성으로 이사를 갈 것이라는 천방지축한 계획까지 세워 밤을 새우며 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믿음은 오히려 너무나도 맹목적일 때 사람을 잡아먹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 때 가졌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이유 또한 이런 믿음이 너무 맹목적이라는 점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지나친 믿음으로 인해 꿈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믿음'을 버리는 믿음


 나는 앞에서 우리가 불편해하는 이유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고 하였다. 나는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신의 꿈이 비현실적이므로 당장 그만두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앞의 글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보기 싫었던 부분들을 '지나친 믿음'이라는 가림막으로 애써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조건 시험에 합격할 것이라는 믿음이 지나치면 시험에 불합격한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어렵다. 시험에 아쉽게 떨어지고 나면 완전히 자신의 믿음에 어긋나는 모습에 자기혐오가 들며 더 이상 도전할 힘을 잃어버린다. 대체 나보다 못한 저 친구는 붙었는데 내가 못난 게 뭐길래 떨어진 것인지 용납하기가 어렵게 된다. 믿음이 너무 지나쳤던 나머지, 자신이 높은 확률로 불합격할 것이라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불합격 확률이 매우 높음을 인정하고 합격에 대한 믿음을 버린다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시험에서 떨어지기 위해 시험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 애초에 시험에 떨어지기로 하였으니 시험문제를 풂에 있어서 별로 긴장할 이유도 없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실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뿐더러, 설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미 떨어지기로 마음먹은 상태이니 충격이 훨씬 덜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마음 상태라면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데 무리가 없다. 앞면이 안 나왔다며 좌절하지 않고 앞면이 나오도록 다시 한번 코인을 던져보는 것이다.


 에디슨이 전구를 상용화시키기 위해 집착적으로 노력한 것은 그의 믿음이 지나쳐서가 아니다. 그가 가진 믿음에는 '높은 확률의 실패'라는 요소도 있었다. 그는 '믿음'이라는 가림막으로 실패의 결과를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믿음은 믿음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분리하고 그 믿음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과거의 실패에서 다양한 피드백을 얻어 지금 우리가 아는 에디슨 전구가 탄생한 것이다.


 올바른 믿음은 '나만큼은 아니겠지'하며 기저율을 무시하고 마치 한 번에 성공할 것처럼 착각하는 마약 같은 것이 아니다. 실패가 있더라도 그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혹시나 한 번에 성공했더라도 환경적인 요소도 큰 부분 작용했음을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실패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위의 '편향'과 관련된 현상을 알았다면 이제 비슷한 실수는 피해야 한다. 내게 노출된 성공한 사례들만을 보며 내가 성공할 확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피상적인 결과만을 보고 그 원인을 지레짐작하여 나 또한 그것을 따라 하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극악무도한 기저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도전이 무조건 성공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무조건' 성공한다는 마음을 버리자. 그보다는 다른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실패했을 경우에 어떻게 대처할지 미리 마음을 먹어보는 것이다. 실패했을 때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그 실패를 딛고 약점을 보완한 뒤 다시 성공에 도전하는 것도, 성공만이 보이는 색안경을 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존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너새니얼 브랜든은 그의 저서 <자존감의 여섯 기둥>에서 자존감을 이루는 큰 기둥 중 하나로 '자기 수용'이라는 것을 언급했다. 자신이 살이 쪘든, 피부가 안 좋든, 능력이 부족하든 그 모든 점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당신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세상은 잔인하고 처참하다. 그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마치 자신이 뚱뚱하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 없듯, 현실에 실패가 난무하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않으면 도전도 쉬이 할 수 없다.


 우리는 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오히려 "무조건 성공해야지!" 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좀 더 용서하면서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성공에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 말이다. 조금 거부감이 느껴지더라도 효과만점인 이 방법을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자. 실패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