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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Oct 04. 2024

프롤로그

새로운 세상, 그곳은 바다

아기들은 같이 숨바꼭질을 할 때면 숨은 둥 마는 둥 하고는 자기 눈만 팔뚝으로 폭 가린다.

 "우리 OO이 어디 갔을까~?"
 "우리 OO이가 어디 갔는지 도저히 모르겠네~"

 이럴 땐 안 보이는 척 그들의 애간장이 타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부러 애먼 곳을 툭툭 건드리며 소리를 내다가 "여기 있다!" 하고 덥석 잡으면 그렇게 꺄르륵 웃으며 신나 할 수가 없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게다. 그리고 여러 차례 붙잡힌 경험을 통해 깨달았을 것이다. 내 눈을 아무리 가려도 남한테는 여전히 내가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내 눈앞이 어두운 것과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완전히 별개라는 사실을. 아니, 사실은 아직도 깨닫는 중이다.

 유럽에 여행을 가 있던 내가 그랬다. 나는 우리나라에 갇혀 살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치이는 사람이 다 한국 사람이니 사람 사는 게 다 이렇구나 싶었다. 그런데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보니 내가 얼마나 좁은 우물 같은 세상에서 삶의 방식을 제한하고 있었나 싶었다. 그들의 시선에서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자 낯설기만 한 외지인일 뿐이었다. 내가 여태 정해놓은 정답은 우리나라에서나 좀 통용될 줄 아는 극히 편협한 선택에 불과했다. 해외에는 내가 아는 선택지의 범주를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인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숨바꼭질 중이었다.

 그런데 사실 해외까지 나갈 필요도 없었다. 제주도 여행을 갔던 어느 날, 바닷가에 앉아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에메랄드 빛으로 청량하게 울렁이는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물장난을 하며 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서핑을 즐기는 선남선녀들. 그래, 기억이 난다. 딱 거기까지만.

 그런데 그 뒤에는?

 엥, 저 뒤편의 수평선 말하는 건가. 그 뒤까지 볼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아니 뭐가 있기는 했던 걸까. 배가 떠 있든, 부표가 떠 있든, 뭐가 떠 있든 말이다. 저 바다 저 멀리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지 나에겐 딱히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항해사가 되었다. 한때 딱히 관심사가 아니었던, 저 바다 저 멀리 떠 있던 '그 무엇'이 되었다.

 어느 날은 항해를 하다가 입항 대기를 위해 제주도 앞바다에 닻을 내린 채 항해당직을 서던 중이었다. 해질녘. 세상이 봉숭아물을 거둬들이고 어둠으로 하루 공연의 막을 내리고 있을 때쯤, 제주도 연안의 이곳저곳에서 불빛이 하나둘씩 밝아왔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육지. 가운데가 육중히 솟아오른 거뭇한 그 뭍에서 밝혀오는 불빛 하나하나는 마치 그들의 삶을 한 줄기 한 줄기 비춰주는 듯했다. 그들의, 아니 우리의 삶은 그렇게 저녁까지 쭉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보인다. 바다 저어편 15해리 즈음 밖에 있는 배들이. 그럴 때면 나의 마음은 이미 그 배로 껑충 뛰어올라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나에게 먼발치 떨어진 육지의 내가 보인다. 그렇게, 저 멀리 떠 있는 그 무명의 항해사 또한 나의 마음에 닿는다.

 난생처음 배를 타러 두바이로 향하던 비행기 안. 내가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앞에 놓인 스크린으로 지도를 켜보았지만, 눈으로 보고도 내가 어디쯤인지 당최 감이 오질 않았다. 내가 지나고 있는 이 바다의 이름이 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보인다. 내가 돈드라 헤드(Dondra head, 스리랑카 최남단이자 항해의 기점 중 하나) 근처 상공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비행기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바다는 내가 몇 년에 걸쳐 가로질러왔던 수십 장의 추억이 겹친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앞길을 가로막는 수십 척의 어선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던 그 아찔한 추억, 동료들과 맥주 한 잔을 하던 그 즐거운 추억, 그리고 배가 없어 타수와 스몰토크로 지루함을 달래던 그 아련한 추억, 그 모두가 저 하얀 파도 위에 묻어있다.

 점차 바다도 그렇게,
 나의 세상이 되었다.






 내가 내 눈앞의 팔뚝을 점차 걷어내고 조금씩 넓혀갔던 나의 세상 중에서 바다에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풀어놓고자 한다. 대양 이곳저곳에서 낚싯대로 건져 올린 작디작은 이야기들.

 어서들 오시오. 싱싱한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들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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