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글 한번 써보라는 말은 줄기차게 들어왔었다. 나는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 암울하고 칙칙한데, 읽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느낌 있다고 하였다. 물론 그 독자층의 100%가 내 친구들이었지만. 그런데 나는, 글짓기 대회나 리포트, 보고서 따위를 제외하곤 내 글 하나를 온전하게 완결 지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냐니?
"왜?"라는 물음을 나는 웬만해선 하지 않았다.
어린 나는 호기심이 참 많았다. 왜 구름은 흘러가나요? 왜 웃으면 배가 당기는 건가요? 그러다 도를 넘을 때도 있었다.
"왜 아빠는 엄마와 이혼했어요?"
"왜 우리 집은 돈이 없나요?"
호기심이 많은 착한 아이. 어른들은 다시 묻지 말라고 하였기에 나는 그 말을 따랐다. 단지 우연에 의해 나란히 식재된 두 나무가 환경과 그 밖의 요인으로 인해 줄기와 기둥이 서로 휘면서 한 몸을 이루듯, 나의 본능적인 호기심과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후천적인 능력은 아주 절묘하게 섞여버렸다.
"너는 참 특이해."
"너는 참 착하네."
특이하다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보통 것이나 보통 상태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다르다 내지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으로, 남들과 구분 짓는 개성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대개 그런 것은 적어도 내게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닌 나 같은 평범한 아이는 그냥 튀는 애, 튀어 보이려고 애쓰는 애 정도로 평가절하되었다. 나의 위치는 애매했다.
착하다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것이다. 이혼이 흠이 되는 시절에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 손에서 컸다. 머리가 굵어질 때쯤에는 우리 집이 전국 평균 이하 중에서도 최하 등급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조금 화가 났을 뿐. 나의 신분상 제대로 된 돈을 벌 수도 없고, 흥미를 꾸준히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포기하면 할수록 나는 빌어먹을 효녀가 되었다.
특이하다와 착하다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성을 당시에는 찾지 못하였다. 특이하다는 낙인은 곧 도태된다는 뜻이었고, 도태된다는 것은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불효였고, 나는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평범해지고 착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살았다.
다시 "왜?"로 돌아가본다.
나에게 있어 세상 모든 사치품 중에 가장 고가품은 "왜"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살 수 없었다. 의문을 품는 순간 호기심이 생겨버린다. 호기심이 생기면 성격상 그것을 해야 하는데, 나는 어차피 그것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쇼윈도에 전시된 반짝거리는 "왜"는 내게는 똥이었다. 무서워서 피하는, 똥.
생활습관은 버릇이 되고, 버릇은 성격이 된다지.
"왜?"라는 질문을 나는 웬만해선 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페이퍼를 적어오라 하면 외워서 낼 수 있는 그대로 적어서 제출했다. 근본적인 이유나 향후 방안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면 나는 묻지 않았다. 신앙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니까, 축하하면 그만일뿐.
병가 기간이 다 끝나가는 친구 동료가 꽤 오랜 기간 나오지 않아도 나는 묻지 않았다. 사정이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내 글에서조차 마침표를 제대로 찍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을 왜 썼는지, 화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날 예정인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가끔씩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문서 편집기에서 커서가 깜빡깜빡거리면, 나는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탁, 닫았다.
그럴 때마다 숨 가쁜 소리가 들렸다. 나의 내부 어딘가에 사는 그놈이 내는 소리였다. 그놈은 뿌리가 거세당한 채로 화분에 단단히 박혀버린 관엽식물이었다.
위로는 이파리 끝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라가고 있었고, 뿌리는 얼기설기 잘려있었다. 왜냐면 내가 그놈 뿌리가 잘리는 것을 보았거든. 그놈 옆에는 큰 나무, 예쁜 꽃나무 같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는 그들을 부러워하며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상상만 하였지, 혹여라도 상상에 힘입어 희미하고 연약한 뿌리를 흙 밑으로 수욱 뻗으려고 하면, 눈을 아래쪽으로 흘깃하였다.
안 돼. 저 밑은 너무 깊고 어두워서 위험해.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으면 죽을 거야. 그놈은 뿌리를 움츠렸다.
그 후 나는 다행히도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다. 나의 행동이 교정된 결과로서 안정적이고 만족할 만한 삶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2년 전 이 맘 때쯤 나는 카메라를 하나 장만했다.
내가 카메라를 산 건 아주 사소한 이유에서였다. 그때 남편과 나는 뉴질랜드 여행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곳 풍경이 그렇게 아름답다기에 그것을 담을 카메라가 필요했다. 게다가 아기를 낳으면 아기 사진 많이 찍는다고 하던데? 남편 친구가 자기 DSLR을 빌려줄 테니 써봐도 된다고 했지만, 음, DSLR은 너무 비싸고 무겁지 않아? 나는 가볍고 성능이 좋다는 미러리스 카메라를 샀다.
남편과 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카메라 상자를 뜯었다. 카메라는 가볍고, 작고 귀여웠다. 그런데 온오프 버튼 뒤쪽으로 나있는 다이얼에 적혀있는 영문 알파벳 대문자들이 심상치 않았다.
M S A P MR, 그리고 그 외 몇몇 아이콘들.
이게 다 뭐야? 카메라가 알아서 잡아준다는 프로그램 모드가 있네? 나는 P 모드로 설정을 고정했다. 화이트 밸런스는 또 뭐야, 태양광, 그늘, 흐림, 백열등? 나는 입맛대로 골라 썼다. 와 이게 역시 미러리스구나! 나는 남편 앞에서 기쁨의 엉덩이 댄스를 추었다.
우리의 뉴질랜드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반 달간 북섬과 남섬을 누볐으며, 나는 보조석에 앉아 운전대를 잡은 남편의 입에 사탕을 까서 넣어주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자연이 그렇게 그림 같다더니, 호주랑은 또 다르다더니, 정말 다르긴 다르구나! 파아란 하늘과 푸른 언덕, 그 위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청정우들, 분홍 보라색으로 살랑이는 꽃밭, 절벽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까지. 나의 미러리스 카메라는, 그리고 P 모드는 우리의 추억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었다.
그때부터 올해 초까지 P 모드로 1년 반을 더 찍었다. 가끔 내킬 땐 매뉴얼(M) 모드도 사용했다. 가끔은 하나 잘 얻어걸려서 그럴싸한 풍경 사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림같은 꽃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카메라가 재미가 없어졌다. 그런데 카메라는 이대로 작은 방 서랍에 처박아두기에는 너무 고가품이었다. 그렇다고 풍경 사진이나 스냅 사진은 이제 질리는데. 인물 사진을 좀 찍어볼 수는 없을까? 그러다 마침 내 눈에 띈 건 영이였다.
평일 오후 6시 반, 나는 내 뒤에서 퇴근 준비를 하는 영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영아, 너 사진 찍는 거 좋아한댔지?"
"네네! 근데 잘은 못 찍고... 실은 누가 찍어주는 걸 좋아해요."
잡았다, 요놈.
초여름에 영이를 끌고 가 수국 꽃밭에 세웠다. 영이는 우리 과 막내 직원으로, 이쁘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수국 사이에 있으니 그야말로 요정이었다. 아이보리 원피스를 입은 영이는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았고, 추노처럼 머리를 질끈 묶은 나는 셔터를 눌러댔다. 내 뒤에서 영이의 미모를 칭찬하는 수군거림이 들릴 땐 내가 괜히 우쭐해졌다. 그 뒤로도 우리는 영이의 방에 있다는 밀짚모자와 우쿨렐레를 들고 해바라기 밭에 가기도 하고, 남의 집 담벼락 능소화 옆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그러다 내가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워보기로 한 건 칭찬 한마디였다.
사무실 은주 언니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슥슥 넘겨보더니 사진을 배운 적이 있냐고 하는 것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는 나에게, 사진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는(동호회에서 만나 결혼까지 했다는) 언니는 말했다.
"사진 한번 배워보지? 감각 있고 재능 있는데. 배우면 금방 늘 걸?"
보통 사진에 입문하는 사람들의 루트 중에 꼭 하나는 있을 법한 뭔가에 재능 있다는 소리. 나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게 그 말 한마디에 꽂혀 부산 일대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학원을 찾게 되었다. 몇 번의 문의전화 끝에 나에게 사진을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았다.
나는 알지 못했다. 예술성은 고사하고서라도 사진 한 장에 생각과, 의도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적 고민들이 그렇게 많이, 진지하게 들어가는지. 나의 가벼운 컨테이너 건물은 조각조각 부서져 자재만이 맨땅에 남게 되었다. 장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