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만보(慶州漫步) #11
꽤 오랫동안 남산을 둘러보고 있는 듯 하다. 그 마지막은 서남산. 남산 종주와 동남산 답사가 불교유적 중심이라면 서남산에서는 신라 역사와 관련된 유적들이 중요하다. 나정, 창림사, 포석정.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 유적들에서 우리는 신라 천년 역사의 흥망을 드라마틱하게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신라 역사의 첫 날을 보기 위해 나정으로 가자. 나정가는 버스는 대릉원 옆 네남사거리에서 5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차에 올랐다. 남산 가는 버스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차는 금방 오릉을 지나 나정 입구에 도착. 물론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
나정에 들어섰다. 많이 변했네. 예전엔 보호각 안에 조그만 우물과 시조 유허비가 소나무 숲에 쌓여 아늑했는데, 발굴 조사하느라 나무들을 다 잘라버려서 좀 어수선하다. 하여간 이곳이 바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 탄강 신화의 현장으로 신라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박혁거세 탄생과 관련된 내용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온다.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즉, 이주민인 혁거세 집단이 기존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나정 근처 서남산 기슭에 사로국을 건국했다는 것. 그런데 이를 역사학자들은 팩트가 아닌 신화로만 받아들인다. 왜? 기본적으로 그분들은 <삼국유사>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부정하니까. 실증주의라는 탈을 쓴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라고나 할까.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실시된 나정 발굴은 이런 주류 역사학계의 인식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이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조사 결과 중 중요한 내용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사유적으로 보이는 팔각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그 밑의 문화층에서는 더 오래된 시기의 우물터와 이를 보호하기 위한 해자, 목책 구멍 자리 등 다양한 시설들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우물터 옆에서 기원전후 제사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두(豆) 형 토기도 나왔다고 한다. 말로 해봐도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다. 도면을 보자.
이제 이해가 좀 되시는지. 우선 한 변이 8m인 팔각형의 건물이 보이고, 그 아래 남동쪽으로 흰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더 오래된 유구이다. 그 중 중앙에 빨갛게 처리된 부분이 우물터이고 그 주위로는 기둥자리, 해자 등이 확인된다. 발굴팀은 원래 우물터가 기원전후에 건립되었다가 5세기경 그 우물을 메우고 팔각형의 건물을 지었으며, 7세기에 다시 한번 개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의 성격은 당연히 제사유적. 그런데 이는 기원전후 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지었으며, 5세기 말 시조가 탄강한 곳에 '신궁'을 건립했다는 <삼국사기>의 나정 관련된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조사 직후에는 이곳이 역사서에 기록된 나정과 신궁이 맞으며 따라서 박혁거세가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맞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곧 기원전후의 우물터가 우물이 아니라 기둥을 세우는 자리라는 타당성 있는 제기되어 이곳은 나정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곳이 초기철기시대 이후 중요한 제사유적으로 사용되어져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발굴을 통해 이곳이 나정이나 신궁이 아닐지라도 기원전후 신라의 전신이었던 사로국 건국의 무대였다는 점만큼은 밝혀졌다고 본다. 또한 서울 풍납토성 발굴과 함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게 너무 많다. 6부의 촌장들 또한 토착민이 아니라 도래인이었을 텐데 왜 스스로 나라를 세우지 못했을까? 또 다른 이주민 집단이었던 박혁거세는 정말 기존의 6부의 세력들과 다툼이 없었을까, 그만큼 강력한 집단이었을까? 혁거세가 처음 등장한 것이 B.C. 69년인데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B.C. 57년에 사로국이 개국된다. 그 1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정말 6부의 추대를 통해 아름답게 나라를 세웠을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짧은 기록을 읽고 또 읽으며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해보려니 머리에 쥐가 나려 한다.
이처럼 신라 건국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지만 현장을 보면 좀 우울하다. 발굴 지역을 흙으로 메워두었을 뿐 잡초가 무성한 폐허. 방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조사 끝난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경주시는 이 중요한 유적을 언제까지 이 상태로 내버려둘런지...
나정을 나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양산재. 길 양옆으로 잘 생긴 벚나무가 도열하듯 서있다. 4월에 벚꽃비가 내릴 때 이곳에 오면 백마가 울부짖으며 하늘로 올라가고 알에서 신성한 아이가 태어나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들과 함께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겠지. 양산재는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던 6부 촌장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아쉽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다음은 사로국 최초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창림사로. 6월 초 막 모내기를 끝낸 동남산 아래 마을 풍경이 정겹다. 그 너머로 산 기슭에 석탑 한 기가 홀로 서 있는데 그곳이 바로 창림사지다. 보이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