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틈날 때마다 경주에 대한 글을 써 오면서 가장 많이 다룬 유적은 고분이다.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처럼 유명한 것도 있었고, 그냥 골목 한 귀퉁이에 조용히 서있는 이름 모를 무덤도 많았다. 그렇게 고분은 언제나 경주를 경주답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유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도 있다. 동네 언덕처럼 푸근한 고분도 좋지만 천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대표할만한 왕릉으로써의 격식을 갖춘, 뭔가 제대로 된 위엄과 품격이 있는 그런 고분이 한 곳 정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내가 들르는 곳이 있으니 바로 괘릉이다.
괘릉. 걸 괘(掛), 무덤 능(陵)을 쓴다. 조선시대 경주부에서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그곳을 메우고 능을 마련했는데, 능의 내부 현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능은 신라 하대 때의 왕인 원성왕(785~798)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경주의 대부분의 무덤들이 오도카니 봉분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괘릉은 표주석을 비롯한 제대로 된 석조물들이 완벽하게 남아있고, 봉분도 돌난간과 십이지상이 조각된 호석을 둘러 여간 화려한 것이 아니다. 이렇듯 괘릉은 통일신라시대의 능묘 양식을 볼 수 있는 귀한 유적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이 능역 초입에 호위하듯 서있는 무인상.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하다. 무덤에 누워 계신 분이 누군진 몰라도 발 편히 뻗고 주무시겠다. 그 어떤 흉악한 악귀가 와도 거뜬히 막아낼 듯 하다. 이 정도는 되야 왕릉을 지키는 보디가드라고 할 수 있지.
무엇보다 능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서있는 무인상이 걸작. 자세히 보자. 먼저 얼굴을 보시라. 항우의 절명시 한 구절인 ‘역발산혜기개세’처럼 산을 뽑고 천하를 호령할 듯한 힘과 기개가 느껴진다.
저 소매를 걷어부친 팔뚝에 표현된 근육들을 보시라! 만지면 진짜 꿈틀꿈틀댈 것 같다. 현대의 장인들에게 근육질의 보디빌더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조각하라고 하면 저렇게 사실적이고 극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태종무열왕릉의 이수, 석굴암을 지키는 인왕상과 본존불상에 이어 다시 한번 신라시대 장인들의 신묘한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다시 한번 무인상의 얼굴을 잘 보시라. 뭔가 이상하다. 일단 신라인, 아니 동양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다. 움푹 들어간 눈, 오뚝한 콧날, 강건해보이는 턱과 고슬고슬한 수염. 이런 얼굴을 묘사하는 딱 떨어지는 표현이 있으니 바로 심목고비(深目高鼻, 눈이 깊고 코가 높다). 그런데 이런 심목고비형 얼굴은 전형적인 터키계 아리아인의 모습으로 보통 서역인상이라 불린다. 지금으로 치면 이란이나 이라크 등에 사는 중동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시면 되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신라왕의 무덤을 지키는 무인상이 저 멀디먼 이역에서 온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여기서 갑자기 떠오르는 향가가 있다.
동경(東京, 경주)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니다가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바라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래 내 것이다마는
빼앗음을 어찌하리잇고
웬만한 한국사람이라면 다 아는 <처용가>이다. 이 향가의 주인공인 처용과 관련된 기사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때는 9세기 말 헌강왕 시절, 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산)로 행사를 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지며 천지가 어두워졌다. 갑작스런 변괴에 놀란 왕이 좌중에게 물으니 일관이 말하길, "이것은 동해 용의 짓이니 좋을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하여 절을 짓도록 명하니 바로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그래서 이곳을 개운포라고 하였다), 동해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그 중 하나가 왕을 따라왔다. 그는 서라벌에 정착하여 급간 벼슬을 하사받고 왕을 보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처용가>의 주인공이 처용이다.
동해 용의 아들이었다는 처용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에 대해 울산지방의 유력 호족이라는 설, 헌강왕의 서자라는 설 등 여러 주장과 논란이 분분한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바로 아랍상인설.
학계에서는 4~6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교류하던 신라가 7세기 한화정책을 통해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다소 주춤했지만, 통일 이후 당나라에 있던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다시 서역과 활발히 교류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나 경주시내에 있는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리잔, 목걸이 등 로마-페르시아계 유리제품들과 그 외 다양한 서역계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이런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더 나아가 9세기 전후에는 서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 때 중국 내 수많은 아랍-이슬람 상인들이 학살을 당했으며 그 중 일부가 한반도로 넘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가 처용이 등장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문헌에서 보이는 처용의 이국적인 외모에 대한 서술과 당시 당나라의 정세(황소의 난) 등을 봤을 때, 중국내에서 활동하던 이슬람 상인들이 발달한 해로를 통해 한반도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벽안의 이슬람 상인이라... 21세기인 지금도 우리에겐 이국적인 존재인 그들이 천년이 넘는 오래전 이곳 한반도에 살고 있었다니. 그것도 왕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갑자기 실크로드란 단어가 떠오른다. 저 멀리 이라크와 이란의 상인들이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 이름도 낯선 투르크인들의 땅을 지나 그 험준한 파미르 고원을 넘고, 돌아올 수 없는 땅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과하여 세계의 수도 장안에 도착한다. 또는 걸프해를 내려와 인도, 싱카포르, 말라카, 광동에 이르는 해로를 이용한 이들도 있겠지. 그리고 다시 육로나 해로를 타고 동쪽 끝 신라에 다다른다. 생각만해도 짜릿하지 않나.
이제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른 석물들도 좀 보자. 특히나 돌사자상. 보통 왕릉의 석수들이 다 근엄하거나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어 뻣뻣하기만 한데, 괘릉의 돌사자들은 웃는 녀석, 똘똘해보이는 녀석, 발로 바닥을 긁고 있는 녀석 등 그 표정이 천진난만하고 몸짓들이 다양해 정겹기만 하다. 근엄한 무인상과 묘한 댓구를 이룬다.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능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정성스럽게 12지시신이 조각된 호석들이 봉분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그 앞에는 돌난간이 장식되어 있어 위엄있는 모습이다. 무덤 뒤의 소나무숲도 울울창창하여 제대로된 왕릉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괘릉을 나오며 꿈같은 꿈을 꿨다. 아내와 딸 세 식구가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꿈을. 딸이 좀 더 크고 나와 아내 무릎이 떨리기 전에 꼭 그 때의 서역인들이 왔던 길을 거슬러 가봐야지. 경주에서 출발해 서안을 지나 돈황까지. 중앙아시아의 평원을 넘고 테헤란을 거쳐 아나톨리아 고원 너머 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그래서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 성 소피아 성당이 서있는 이스탄불, 옛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 생각만해도 가슴이 뛴다. 반드시,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