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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Mar 12. 2021

[극장에서 본 오늘의 애니메이션]  해변의 에트랑제

해변의 에트랑제 (2021)

BL이라는 장르의 원작이면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해변의 에트랑제를 보고 있으면 퀴어라는 장르와 BL이라는 장르의 경계는 무엇인지 골똘히 고민해보게 된다. 어디까지를 장르의 영역으로 정의 내리고 받아 들어야 하는가? 장르라는 경계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애니메이션 해변의 에트랑제는 기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 작품의 화려하고도 순수한 작 화과 BL의 원작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렇게도 말한다. 해변의 에트랑제에는 서사가 부족하다. 둘의 관계가 처음의 우연으로 시작된 만남이 왜 사랑으로 이어지는지 모른다. 슌과 미오가 시간이 지나고 갑작스럽게 다시 만나 사랑의 감정의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략된 것이 너무 많아 우리는 무엇을 보고 판단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서사가 비어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말과 행동으로 장면에 담아내는 것만이 서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생략된 서사와 편집으로 잘린 장면들의 빈자리를 어떻게 표현했고 상징으로 담았으며 연출이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분명히 드러나는 표현들은 많았지만 부족한 상영시간과 조금씩 드러나는 연출의 아쉬움 때문에 찾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연출로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상징을 부여했고,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편집과 교차하여 연결시켰지만 그것은 그들이 감정의 전환점으로서 받아들인 이유로서 충분했다. 


이런 애니메이션은 오키나와에서 소설가를 지망하는 슌과 미오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가족의 죽음으로 혼자가 되어버린 미오에게 슌이 찾아온다. 혼자라는 씁쓸한 감정과 주위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과 다르게 슌은 자신이 미오를 좋아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미오의 부재로 잊힌 것 같지만 다시 새롭게 만나는 과정을 통해 미오는 슌을 향해 고백하며 사랑을 전달한다. 하지만 슌은 그런 미오를 밀어내고 경계한다. 그저 평범하게 여자를 만나고 결혼을 하라는 태도와 미오가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는 슌을 믿지 못하면서 두 사람은 쉽게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를 좋아하지만 슌을 더 좋아하기에 사랑할 수 있는 미오도 동성애자로서 트라우마가 있던 슌도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솔직히 고백한 후에나 자신들의 관계를 확고하게 만든다. 다만 슌의 갑자기 둘 사이를 가로막는다. 결국 과거는 그들의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슌 스스로가 미오가 과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애니메이션은 결말에 다가간다. 


이렇게만 본다면 애니메이션 해변의 에트랑제는 단순히 두 남자의 사랑 관계와 갈등의 문제로 점철된 해프닝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프닝이라고 하기에는 두 사람의 관계의 진전은 빠르다. 이성애자이지만 슌을 사랑하는 미오와 동성애자이지만 미오를 밀어내고자 했던 슌이 이렇게 연결되기까지 부족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감독은 연출적인 마술을 이용했다. 


바로 중요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꽃을 이용한 배경에서 드러낸다. 슌이라는 동성애자의 꽃은 언제나 보라색이며, 미오의 색은 하얀색이다. 그들은 빨간색의 꽃을 사이에 두고 경계된 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서로의 상징으로서 의미로 보인다. 여러 번의 나타나는 꽃의 모습은 가족, 연인에 대한 관계를 그리고 나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의 요소마저 담겨있다. 꽃뿐만이 아니다. 앉았던 벤치, 바다, 방이라는 공간의 경계를 통해서 둘은 서로라는 존재를 정의 내린다. 동시에 서로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을 때 공간은 연결되고 배경은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해변의 에트랑제라는 작품은 덧붙여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에트랑제라는 프랑스어를 사용한 부분이었다. 프랑스어로 에트랑제는 이방인을 뜻하는데 왜 이방인으로 그들을 정의 내리려고 했을까? 미오라는 오키나와 출생의 소년이 슌이라는 이방인의 마주침을 통해서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동시에 퀴어로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의미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혹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모습처럼 뫼르소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태양이 작렬하던 해변가에서 이방인과의 조우와 살인이라는 명백한 사건의 연속을 작가는 사랑으로 정리한다. 


다만 작가의 서사가 이방인의 모습을 따라 했다는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비유에 가까운 표현이며 애니메이션은 표면적인 이방인의 형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사랑을 하기까지 퀴어라는 세계의 이방인으로서 살아온 슌의 현실과 미오의 이상향의 충동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슌은 이미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만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언제나 소문에 시달리며 트라우마를 겪거나, 자신의 사랑의 대성에 말도 못 붙인다. 가족에게는 연까지 끊기는 등의 참혹한 사회를 등진 자의 모습밖에 없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미오를 사랑하면서도 받아주지 못하는 슌의 감정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미오는 그런 과거를 이미 겪었던 어른에게 다가선다.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지만 사랑하는 상대를 지키고자 하는 관계를 정의하고자 하려는 모습은 현실 속에 이방인이 아닌 이상향 속의 이방인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도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저 나만의 상상이 점철된 몽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서사의 덧붙여진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혹은 덧붙이는 것은 단지 서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서사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지를 결정하는 태도라고 본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 해변의 에트랑제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랑이라는 관계의 전형적 모습 너머 사랑하는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삼킬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영화이다. 


동시에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현실의 모두에게 지탄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마저 모두 무시한 채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결심에 대한 용기를 묻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이를 BL이라는 장르의 영역으로 볼 것이다. 그래도 장르의 영역이 완벽하게 정의되지 않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해변의 에트랑제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P.S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유아사 마사아키, 야마다 나오코 같은 감독이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주역이라고 봤는데 이번 감독의 데뷔작을 보면서 나름의 기대감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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