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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착한 레몬 Aug 16. 2022

차곡차곡_글6

*차곡차곡은 양혜리작가와 내가 함께 쓰는 글이다

1. 지난주에 작가와의 대화가 있었다. 시작하기 전 테이블에 앉아 차분히 원고를 둘러보는 내게 작가님이 오셔서 긴장된 얼굴로 말을 건네셨다. 요지는 오늘 이 행사명이 ‘작가와의 대화’이긴 하지만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고, 나는 ‘안 된다’는 말 대신 다른 자리라면 몰라도 오늘은 작가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답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뒤로하고, 짧은 순간 설득이 되었던 걸까. 작가님은 ‘그래도 해야겠죠? 열심히 한번 해 볼 게요.’라고 답했다. 행사는 무사히 마무리되었지만, 그날 내 머리에 남은 것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이었다. 

*정말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2.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의 서문에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학생이지만 책 한 권의 글감이 되지 않았던 어린이라는 세계가 사실은 우리를 환대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어 작가는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의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을 힘주어 말한다. 얄팍하고 편협해서 사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라는 세계’를 아프게 마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세계가 넓어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책을 읽는다는 건, 어느 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다가서고 바라보려는 우리의 모습은, 글을 잘 읽지 못하더라도 더듬거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어린아이의 의지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 


3. 사람이 말을 배우며 언어를 익히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작가와의 대화에서 우리가 나눈 내용에는 ‘조형의 언어’가 있었다. 어떤 기획자들은 그것을 미술의 문법 혹은 맥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모두 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표현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의지가 언어를 만들었다는 생각에서 ‘언어’라는 말을 사용했다. 언젠가 선배 기획자가 작가는 모호해도 기획자는 모호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기획 단계에서 오고 갔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충실하게 답하다 보니, 조형의 언어까지 가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추상적인 것들이 우리의 질문 속에 오고 갔지만, 어쩐지 이 말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 같아 후련하기도 했다. 


4. 한 관객분이 작가님에게 사진, 영상 말고 그동안 해왔던 천 작업이 너무나 궁금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것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말해줄 수 있냐고 질문하셨다. 당연히 작가님은 ‘그렇게까지는 설명할 수 없고요, 그런 식으로 의미를 가지지도 않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순간 나는 관객을 이해시켜야 하는 것은 온전한 내 몫인 것 같아 머리를 굴렸는데, 그때 ‘조형의 언어’가 나왔다. 


“회화라는 전통적인 장르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이미지적인 대상 하나하나에 의미를 만드는 작가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보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표현하는 방식은 ‘조형의 언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를테면 시각 이미지가 재현되는 캔버스의 틀 안에서 혹은 사진 프레임 안에서 혹은 전시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미지들은 방향성, 속도, 무게감 등과 같이 다른 제스처를 취하면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요. ‘빨강은 통상적으로 열정을 나타내는 색이니까 ‘와 같은 단순한 대입의 방식으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많은 작가들이 작업의 요소요소마다 의미를 생각하지는 않는 지점일 것 같은데요, 대신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방식 혹은 전시장에 설치되는 방식과 같이 시각예술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어떻게 표현을 했냐는 것이 어쩌면 관객 분들이 궁금한 부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얘기하고 나는 앞에 계신 분들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깜깜했다. 내가 너무 어려운 방식으로 말을 한 것이다.                


5. 다시 고쳐서 

“한 작가가 그림을 그립니다. 이 작가가 회색을 쓰는 것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전에 이 작가는 캔버스 전체에서 어떤 부분이 무너지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무너지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무너짐을 표현하기 위해서 움직임을 만들어 냅니다. 움직임의 힘을 더하기 위해서 명암을 줍니다. 더 짙어지는 부분이 늘어날수록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무너짐의 강함이 더해집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많은 예시들을 이야기했지만, 마지막에는 이 말들이 굳이 필요했을까 하고 후회했다. 작가님은 “마음으로 느끼시면 되죠. 제가 만들 때 느꼈던 것과 다른 방식이어도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그런 지점들이 흥미롭습니다.”라고 이야기하셨고, 작가와의 대화는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들이야 말로 예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와 같은 식상한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작가와의 대화가 끝난 뒤에도 전시장을 금방 나서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 작은 실마리라도 찾듯이 많은 사람들이 전시 작품 하나하나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관객들은 그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조형의 언어는 늘 선명해야만 하는 걸까. 언제나 그렇듯이 실체 없는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 다녔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읽었던 책 ‘작업실 유령’에 등장하는 실체 없는 인물 ‘토마’를 떠올렸다. 태어난 시대도, 국적도, 성별도 없이, 다만(예술을) 의심하면서 믿는 자‘라고 묘사되어 있는 토마의 성격이 작가와의 대화 속 우리의 모습 같아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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