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살라(Dharamshala), 티베트 임시정부
다람살라(Dharamsala)는 길고 긴 인도 여행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였다. 그 조용한 분위기와 깔끔한 숙소, 음식, 다람살라에서 머물렀던 모든 날들이,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좋았다.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어서 숙소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승려들이 대부분이었다. 맥로드간지는 차분한 분위기였고, 그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다람살라는 인도의 다른 도시들처럼 상인들이 달려들거나 박시시 요구가 거세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절제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주류의 판매마저도 금지되어 있었다.
티베트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달라이 라마 궁도 구경할 수 있는 데다가 미리 예약을 하면 달라이 라마를 접견할 수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후회가 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구태여 찾아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고나 할까 혹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어 실력이 되지 않았었다고나 할까.
다만, 레스토랑 샹그릴라(Shangri-La)에서 만났던 한 스님과는 친구가 되어 자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의 외모가 중화권 영화배우인 이연걸과 비슷해서 나는 그를 연걸스님이라고 부르곤 했었다(실제 그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람살라를 떠난 후에, 보드가야에서 그에게 엽서를 보냈지만 실제로 그에게 엽서가 도착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도에서 편지란 도착해야 도착하는 것이고, 사실은 아직도 배달이 완료되지 않고 어딘가에서 배달 중일지도 모른다.
레스토랑 샹그릴라뿐만 아니라 다람살라 산비탈길에 자리 잡은 대부분의 숙소와 음식점들은 깨끗했다. 당연한 일이겠으나 레스토랑에서는 다른 어떤 도시에서보다 본격적인 티베트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인도 여행 중 자주 먹었던 초면뿐만 아니라 티베트 만두인 '모모'와 칼국수와 비슷한 '툭빠'를 자주 먹었다. 티베트 음식은 주로 한국 사람들 입맛에 잘 맞는 편이었고 나에게도 그만이었다. 나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서양식으로 아침마다 토스트에 스크램블, 커피를 먹는 것도 취향에 맞지 않았고, 치킨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탄두리 치킨도 즐겨먹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티베트 음식들마저 없었다면, 인도 여행을 그렇게 오랜 시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도 여행에, 아니 여행 자체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내가 별안간 인도로 여행을 떠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H는 나를 떠났고, 나를 떠난 H는 돌연 인도로 향했다고 했다. 그랬다. 그래서 나도 인도로 향했다. 어디로 향했는지, 이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때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자들이 다니는 도시는 대략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 만났던 여행자를 저 도시에서도 다시 만나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n개의 도시와 n개의 여행을 넘어 사람들 사이를 여행하고 있었고, 여행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나는 다람살라에서 하염없이 머물렀다. 도시가, 사람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료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구경거리를 찾아야만 했다. 론니 플래닛을 읽다가 근처에 박수나트 폭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폭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순전히 할 일이 없어서 발길을 향했다. 폭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는 멀었다. 게다가 건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던 터라 막상 폭포에 도착하고 보니 장엄은 고사하고 폭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물줄기가 산자락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고작 이 따위 폭포를 보려고 여기까지 발걸음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다시 맥로드간지 방향으로 향했다. 폭포 인근에는 관광객들이 남겨둔 낙서들이 벽에 가득했다. 알아볼 수 없는 언어들의 바벨탑. 필경은 나름의 여행의 이유들이, 함께 한 사람들이 기억이 거기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분간할 수 없는 거대한 바벨의 벽 한 복판에서 나의 눈길을 강렬하게 끄는 낙서가 있었다. 익숙한 언어였다. 한글이었다. 단 한 문장의 한글.
"그대, 아직 살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세가 묻어나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 낙서의 벽 앞에 서서 누군가가 한 문장을 남겼을 것이고, 나는 n개의 여행을 넘어서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직 살아 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능한 일들이 가득 찬 세상이지만 때로는 불가능한 일들도 일어나는 곳이 세상이다.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여행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 내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기형도의 시처럼 나도 내 마음속에 한 줄의 기록을 남겼다. 다람살라를 방문한 또 다른 누군가도 나처럼 박수나트 폭포에서 저 문장을 발견했을까? 저 문장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여행의 이유가 되어 주었을까?
다람살라에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망명한 티베트 사람들이 길을 찾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 틈에서 길을 찾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여행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발견했다. 그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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