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eattle
여섯 번째 기억
시애틀, Seattle
꿈같은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지금 같은.
그녀는 요즘 자몽에 빠져있다.
나는 왜 그런 텁텁하고 두꺼운 쓴 귤을 먹느냐며 타박했지만, 그녀는 너 같은 초딩 입맛은 어른의 입맛을 잘 모르는 거라며 내 볼을 주욱 당겼다. 함께 먹는 아침에서도 그녀는 자몽 반 조각, 자몽요거트를 먹었다. 나는 어젯밤에 제이가ㅡ그녀의 남자 친구다ㅡ 남겨 놓은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먹었다.
"나는 미국에서 못 살 것 같아."
"입 안에 있는 것 좀 다 씹고 말하시지?"
그녀가 자몽 한 조각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미국에서 먹는 김치찌개는 왜 한국에서 먹는 것과 맛이 다를까?"
"뭐.. 그거야 물도 다르고 공기도 달라서?"
"나는 진짜 김치찌개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그나저나 제이는 미국 사람인데 왜 이렇게 김치찌개를 잘해?
너무 맛있어."
"제이는 요리사잖아. 뭐든 잘해. 심지어 제이가 주는 물 있잖아. 그것도 맛있다?"
평소 제이 앞에서 칭찬을 잘하지 않는 그녀는 꼭 제이가 없을 때만 그의 칭찬을 한다. 이상해. 너는 변태야. 언젠가 제이가 너한테 헤어지자고 해도 너는 할 말 없어. 우리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침 9시를 알리는 알람 소리에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남은 자몽 조각을 입안에 구겨 넣고 나 다녀올게! 하면서 후다닥 하고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한 달 넘게 그녀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제대로 뭔가를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아 오늘 저녁은 회사 사람들이랑 먹지 말고 들어오라고 막 결혼한 아내처럼 말했다ㅡ그녀가 출근하고 있을 때 배웅하면서 말한 거라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ㅡ. 그녀는 평소보다 세 배는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뭐? 너가 요리를 한다고? 하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하면 해! 여하튼 일찍 들어와.라고 말했다. 그녀는 현관문을 닫으면서도 고개를 연신 갸우뚱했다.
*
그녀가 출근을 하고 나서는 조금 바빴다. 바닥을 청소기로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아침에 먹고 난 그릇까지 씻고 나니 낮 12시가 훌쩍 넘었다. 서둘러 장바구니를 들고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으로 향했다.
마켓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작았다. 여행책에서 봤을 때는 뭔가 거대한 느낌이었는데 실제는 우리네 사는 곳과 별 반 다르지 않은 시장이었다. 다만 좀 더 생기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괜히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하나? 그녀가 좋아하는 자몽을 포함해 평소 잘 먹지 않는 과일까지 한 꾸러미 샀으니 말이다.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손짓 몇 번에 장바구니가 반 이상이 차 버렸다. 나는 황급히 댓츠 이너프를 외치면서 과일 한 꾸러미를 들고 나왔다. 김치찌개에 넣을 야채들과ㅡ대부분은 그녀의 집에 있었다ㅡ 약간의 고기, 그리고 상술(?)에 넘어가 생선도 한 손 구매했다.
나는 대부분 혼자 글을 쓰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는 만들어낸 시간이 아니고서야 겪기 힘들다. 더군다나 시애틀에 오면서부터는 시장보다는 마트를, 바bar보다는 카페를 이용했기 때문에 집에서 그녀와 제이를 제외하고는 만나는 사람도 드물었다. 시애틀에서도 자거나 산책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시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는 사실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서ㅡ어쩌면 나를 위해서ㅡ 이 시장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나쁘지 않았다ㅡ오히려 좋았다고 하면 그가 안심을 할까ㅡ. 이 곳은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을 먹고 싶게 만들고, 장식할 생각이 없던 꽃들도 한 다발 사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풀 선물을 구입하게 하고 가끔은 지난 추억에도 잠기게 한다. 시장의 에너지는 대단하다.
물건 한 꾸러미를 들고 나오며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파이크 플레이스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에 들렀다. '나의 그'와 함께 나눠 쓸 텀블러와 몇 가지 종류의 커피를 샀다. 스마트폰으로 일일이 검색해 가며 한국에서 팔지 않는 종류의 커피를 고르느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쏟았다. 거기다 집으로 가는 차가 예상보다 더 막혀 나는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요리 어플을 보면서 음식을 만들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쏟았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선물을 받고 좋아할 사람들의 얼굴을 떠 올리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
집에 도착하니 이미 그녀가 집에 도착해 있었다. 제이도 함께 였다. 물건 한 꾸러미를 들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제이가 뛰어나왔다. 이게 다 뭐야? 어수룩한 말로 제이가 물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 웃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향해 오늘 저녁은 뭐냐고 물었다. 그 사이 제이는 내가 장 봐온 것들을 주방으로 가져가 정리하고 있었다.
"응? 오늘 스페셜 한 그대의 저녁은 무엇인가요오?"
그녀가 내게 다가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과일 장바구니에서 큰 자몽을 두 개 꺼내며 이거지!라고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그녀는 장난치지 말라며 자몽을 들고 나를 쫓아왔고, 제이는 그런 우리 둘을 상관하지 않은 채 김치찌개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범람하는 기억을 기록합니다.
@cu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