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eattle
다섯 번째 기억
시애틀, Seattle
뿌옇고 차가운 꿈들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아침은 늘 안개로 맞이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나의 꿈은 뿌연 연기 속이었다. 꿈에서 나는 홀로 버드나무 군락지를 걷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환상이었지만 길을 걷는 것조차 고통의 연속이었다. 발을 겨우 하나 떼면 다른 발이 말썽이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덕분에 괴상한 얼굴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그러다 한참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나와 내 목을 살며시 어루만져줬다. 꿈에서 깼을 때 나는 거짓말처럼 울고 있었다.
*
한국에서는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는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셨다. 이상하게 그렇게 되었다. 엊그제는 집 앞의 카페에서, 어제는 시애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오늘은 남동생과 전화 통화를 하며 집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나와는 다르게 수다쟁이인 남동생은 그간 나와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오늘 하루 종일 할 심상으로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런 동생이 귀여웠다. 동생이 군대 선임의 욕을 할 때마다는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심각한 얘기야! 집중해서 들으라고! 누나는 몰라! 그 소보로 빵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거였는데! 눈 앞에서 뺏어갔다니까? 설명하는데, 나는 또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엔 둘이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얼마나 깔깔댔었는지, 통화를 하는 나를 지켜보던 그녀가 실눈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아! 어제 형이랑 같이 칼국수 먹었어. 근데 누나 너무 시애틀에 오래 있는 거 아냐? 벌써 한 달이 다 돼가는데? 형은 어쩌라고 왜 거기에 계속 있어? "
남동생이 말하는 형은 '나의 그'를 말한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내가 사랑하는 사람. 동생 입에서 자연스레 형이란 말을 들으니 가슴이 욱신했다. 사실 그와 나는 일주일 전에 크게 다퉜다. 얼굴을 보지 않고 전화로 다퉜기 때문에 우리 둘은 서로에게 더 쉽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다. 통화 중간에 그가 한 숨 한 번 쉰 걸로 30분을 싸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간 말하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감정에 바람 한 번 분 걸로 우리는 거센 태풍을 아무 준비 없이 맞아야 했다. 때문에 당연히 다른 것들은 간단히 무너졌다. 우리 둘은 끝까지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연락을 해야 할 시간에 연락을 하지 않았고, 나는 이 곳에 머물며 그와 함께 보고 싶은 것들, 다음에 같이 여행 오면 가고 싶은 곳들,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시애틀에는 비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렸고 나는 매일매일 안갯속에 서 있는 채로 소용돌이치는 감정에 시달렸다.
"금방 갈 거야. 아직 여기가 더 좋아서 그래."
"에이.. 그래도 형보다 더 좋을까.. 나는 내 여자 친구랑 그렇게 오래는 못 떨어져 있을 것 같아."
"너희는 이제 막 한 달 째잖아."
"아무튼 형이 좀 외로워 보였어. '꿈속에 있는 사람' 같았어. 누나가 빨리 한국에 와."
지난 한국에서의 1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글을 쓰는 직업에 회의감을 느낄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글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변한 건지, 그냥 단순히 힘에 겨운 건지, 그때마다 그러한 격정들을 잘 보듬어 준 것은 분명 그이다. 그가 이 곳으로 가라고 말도 해주었고, 나는 그의 말이라면 전적으로 신뢰하는 편이기 때문에 두말할 것도 없이 시애틀을 여행 장소로 골랐다.
하루에도 비가 몇 번은 내리는 도시. 커피의 향이 도처에 널려있는 도시. 어둑한 하늘 사이로 간간히 내리쬐는 낭만이 도시 전체를 블루스 하게 만드는 곳. 나는 처음부터 이 도시가 퍽 마음에 들었다. 이 곳에서는 굳이 달력을 보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고, 굳이 시간을 따지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 곳에는
'그'만 없다.
*
「한국에 비가 많이 와. 네 생각이 난다. 내가 미안해.」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다 되어서야 오래간만에 그의 문자가 도착했다. 한국은 지금 밤이겠지. 오늘은 꿈에서 그를 보고 싶지 않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전화를 했다.
# 범람하는 기억을 기록합니다.
@cu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