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eattle
네 번째 기억
시애틀, Seattle
하지만, 그의 손은 따뜻했다. 온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손이었다.
그가 내가 있는 벨뷰로 온다 말했다. 나는 일부러 이쪽으로 올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어차피 집과 멀지 않아 괜찮다고 그는 말했다. 짧은 문자가 두어 번 오가고 결국 벨뷰에 있는 한 카페에서 그와 만나기로 정했다. 약속시간은 한참이나 남았는데 주책맞은 가슴이 뛰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설레거나 하는 감정보다는 그의 시간을 빚진 기분이랄까. 나는 나의 것들을 비워내고 싶어 이 곳으로 온 것인데, 그를 만남으로서 다른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은 아는가 하는 ㅡ물론 사랑의 감정은 아니다ㅡ 아주 묘하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맨 손으로 그를 만나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일찍 집을 나섰다. 집에서 20분 정도만 걸어 나가면 예쁜 꽃집이 있다. 처음 이 곳으로 왔을 때 눈여겨봐 두었었는데 이렇게 일찍 방문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코끝을 간지럽히는 예쁜 향기들이 가득 있었다. 좋아하는 꽃들도, 처음 보는 꽃들도 조화롭게 어우러져 지친 나를 반겨주는 느낌이 들었다. 점원과 함께 어떤 꽃을 선물하는 것이 좋은지 고민했다. 점원은 꽃을 받으실 분은 어떤 분이세요? 하고 물었고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두 번째 만나는 남자인데 어떤 꽃을 좋아할까요? 나이는 잘 모르지만, 저보다 어려 보였으니 스무 살 후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점원은 왜 인지 모르지만 나보다 더 신나게 꽃을 골라주었다. 그러한 시간은 꽤 즐겁게 지나갔다. 상대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고, 현재의 상황을 직시해야 하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야 하는 까닭에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 참 익숙지가 않았다. 사실 꽃을 선물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단지 집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선물할 걸 하고 살짝 후회했다.
분홍색 계열로 예쁘게 꾸며진 작약 한 다발을 손에 들고 나오면서 슬쩍 웃음이 났다. 뭐라고 하면서 꽃을 줘야 하지?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에 걸릴 때마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다 초록불로 바뀌면 거침없이 카페를 향해 걸었다. 가슴이 혼자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참 묘하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
기대와는 다르게 그와의 만남은 짧고 간결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작약 한 다발은 고맙다고 말했지만 그다지 흥미를 느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커피 두 잔, 쇼콜라 케이크 한 개, 딸기 케이크 한 개를 먹을 동안 우리는 할 이야기를 모두 나누었다. 그는 내게 우리가 처음 비행기에서 만났을 때 내가 자신보다 훨씬 어릴 거라고 생각했었다는 이야기, 누나라는 말에 깜짝 놀랐었다는 이야기, 한국에는 출장 때문에 한 번 가봤었다는 이야기, 먹어 본 음식 중에서는 떡볶이가 매웠다는 이야기, 그리고 본인의 여자 친구와의 문제점에 대해 간간히 조언을 구했고, 나는 성실히 그에 따른 답을 해주었다. 만남에 무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간단한 만남이었으면 집에서 호박 타르트에 따뜻한 우유나 마시는 건데 하고 두어 번 생각했다.
같이 카페를 나와 헤어지는 길목에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나는 빠르게 돌아섰다. 빨리 집에 가서 목욕하고 호박 타르트 먹어야지 하며 별생각 없이 걸었다.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도 간단히 문자를 남겼다.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고, 나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던 것 같다고 투정도 부렸다. 강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시애틀에 왔는데 쓸데없는ㅡ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ㅡ 호기심으로 감히 바다를 꿈꿨다.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러한 불긋한 마음들을 빨리 뜨거운 수증기로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다시 하얘질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하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바탕 했다. 몸이 미끈해져서 싫어하던 거품입욕제도 풀었다. 아까 마셨던 카페인까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
목욕을 마치고 나서도 한참 뒤에나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한국에 있는 그에게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걱정 마. 당신은 웃는 그림이 예쁘니까.」
손끝에서 작약 냄새가 찡했다.
# 범람하는 기억을 기록합니다.
@cudy